탐욕으로 얼룩진 가문은 몰락해도…구찌,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로 본
명품 브랜드의 흥망성쇠

소송·배신·암살…
가업을 차지하기 위한
구찌 가문의 비극 실화

전문 경영인 체제 이후
과감한 패션으로 부활

메타버스 등 신사업 도전
'MZ 명품'으로 승승장구
구찌 가문의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가수 레이디 가가(가운데)가 희대의 악녀로 열연했다.
“그들은 땅과 권력을 위해 싸우지 않아. 그들은 껍데기를 위해 싸우지.”(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중)

역사가 오래된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은 창업자의 이름을 품고 있다. 구찌의 창업자는 구찌오 구찌다. 샤넬 역시 창업자인 코코 샤넬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정했다. 에르메스를 세운 티에리 에르메스도 마찬가지다. 루이 비통도 창업주의 이름이다. 인간이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을 가문의 이름을 걸고 최고급으로 만드는 브랜드는 자신만의 헤리티지를 구축하며 명품의 반열에 오른다. 이름은 그때 선망의 대상이 된다.지난 12일 개봉한 ‘하우스 오브 구찌’는 구찌를 이름으로 가졌던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1995년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마우리치오 구찌 청부살인 사건을 통해 가족경영으로 시작한 구찌가 가족 갈등과 경영 실패로 3대 만에 투자회사에 넘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밀짚모자 판매상에서 부의 상징으로

구찌 가문의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가수 레이디 가가(가운데)가 희대의 악녀로 열연했다.
평범한 집안의 딸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레이디 가가 분)는 파티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안경을 쓴 훤칠한 남자가 머뭇거리며 밝힌 이름은 마우리치오 구찌(애덤 드라이버 분). ‘부유함과 스타일, 권력을 의미하는’ 이름을 듣는 순간 파트리치아의 눈이 번뜩인다. 파트리치아는 마우리치오를 따라다니고 우연인 척 그와 마주쳐 만남을 시작한다. 둘은 마우리치오의 아버지 로돌프 구찌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로돌프 구찌는 구찌 창립자 구찌오 구찌의 막내아들이다. 구찌오는 밀짚모자를 팔던 부모가 파산하자 고국을 떠나 영국 런던에서 호텔 벨보이로 일했다. 이때 영국 고위층이 갖고 다니던,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고급 가죽 트렁크들을 눈여겨봤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1921년 피렌체에 최초의 구찌 매장을 열었다.
알 파치노가 영화에서 연기한 장남 알도 구찌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로마로 사업을 확장했고 2차세계대전 후 구찌를 뉴욕과 런던, 파리와 도쿄 등으로 진출시켰다. 대나무 손잡이와 돼지 피혁으로 제작한 대표 제품 ‘뱀부백’도 알도의 아이디어로 전해진다. 배우 출신의 로돌프가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에게 선물하려 제작한 플로라(꽃무늬) 스카프(사진)는 구찌의 대표 디자인이 됐다. 가방에서 의류와 신발, 향수 등으로 카테고리는 확장됐고 구찌는 부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투자회사에 이름을 넘기다

가족 간 갈등이 시작된 건 영화의 배경인 3대째다. 알도의 아들 파올로 구찌는 자신의 디자인으로 독자적인 라인을 론칭하겠다며 아버지, 로돌프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파트리치아의 노력으로 알도의 신임을 얻은 마우리치오는 이를 이용해 구찌를 사실상 지배하던 알도를 몰아낸다. 알도가 구찌의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했던 것 등이 이유였다. 파올로는 알도를 탈세 혐의로 고발하고, 알도는 1986년 80세를 넘은 나이에 감옥에 간다.

마우리치오는 바레인 투자회사 인베스트코프와 몰래 손잡고 구찌 가족들의 지분을 사들이게 했다. 그는 인베스트코프를 업고 구찌의 전권을 틀어쥐었다. 구찌를 훗날 부활시킨 디자이너 톰 포드도 이때 영입했다. 그러나 회사를 경영하는 능력은 없었다. 실적 부진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1993년 인베스트코프에 구찌를 넘긴다. 진즉 사이가 틀어진 파트리치아에게는 이혼을 요구한다. 그리고 분개한 파트리치아가 고용한 살인 청부업자의 권총에 맞아 숨진다. 영화도 여기서 끝난다.

원작인 논픽션 소설의 저자인 사라 게이 포든은 구찌가 가족 기업의 한계를 보여줬다고 분석한다. 창업자나 후손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이를 현실에 맞게 다듬고 경영을 책임지는 조력자가 없으면 기업을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평가다.

엔딩 후 이야기

구찌 가문으로부터 독립한 구찌를 부활시킨 주역들이 있었다. 구찌 가문 담당 변호사였던 새로운 최고경영자(CEO) 도미니코 데 솔레와 1995년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톰 포드다.

포드는 과감한 노출을 감수하는 ‘포르노 시크’의 창시자로 마돈나 등 당시 유명인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1999년에는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이끄는 루이비통 모에헤네시(LVMH)의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에 대항해 케어링그룹(구 PPR그룹)과 손잡는다.

2004년 포드가 구찌를 떠나고, 이후 스트리트 중심의 패션 트렌드가 부상하며 구찌는 다시 부진에 빠졌다. 반등이 시작된 건 2015년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발탁되면서다. 미켈레는 우아하고 고상한 명품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동물과 곤충, 꽃이 잔뜩 등장하는 강렬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호랑이 머리 모양의 금속 장식으로 유명한 ‘디오니소스 백’도 그가 선보인 2015년 봄·여름 시즌 패션쇼에서 공개된 작품이다. 젊은 층이 즉각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제페토 ‘3D 구찌 빌라 월드맵’
최근 구찌는 명품 브랜드 중에서도 신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와 로블록스 등에서 수십여 종의 아바타용 가상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다음달부터는 구찌 제품을 기반으로 대체불가능토큰(NFT) 컬렉션도 출시할 예정이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