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거웠다"…고승범 금융위원장이 감상평 남긴 드라마는? [이호기의 금융형통]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지난 25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금융발전심의회 전체회의에서 발언하는 모습. 한경DB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연휴를 맞았습니다. 이번 설연휴도 코로나19 오미크론 확산에 따라 고향을 찾는 대신 집에 머무르며 영화 드라마 등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지난해 8월 31일 취임 직후 맞았던 추석 연휴 당시에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고 위원장도 연휴 기간 집에서 쉬면서 드라마 한편을 시청했는데요.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오징어게임'이었습니다. 연휴 직전인 9월 17일 공개된 오징어게임은 닷새만인 22일 미국 넷플릭스 시청 순위에서 한국 드라마 사상 첫 1위에 오르며 글로벌 흥행몰이를 막 시작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고 위원장은 지인의 추천을 받아 넷플릭스에서 1편부터 9편까지 몰아서 감상했고 연휴가 끝난 뒤 감상 평을 금융위원회 직원들과 공유하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고 위원장이 본 오징어게임은 과연 어땠을까요. 고 위원장은 먼저 "재미있다기보다 마음이 무거웠다"는 감상을 털어놨다고 합니다. 오징어게임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가계부채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금융당국의 수장으로서 책임감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고 위원장이 전체 드라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도 마지막회인 9화에서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분)이 오징어게임을 마치고 나온 뒤 머리를 깎으러 미용실에 들른 장면을 꼽았습니다.

미용실에 있던 TV에는 마침 "가계부채가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는 한국은행발 뉴스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 장면이 고 위원장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것입니다. 추석연휴 때 재미삼아 보게 된 오징어게임이 오히려 가계부채 문제를 어떻게든 해소해야겠다는 정책 의지를 다잡게 한 셈입니다.
오징어게임과의 인연(?)은 그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추석연휴 이후 실시된 국회 국정감사에서 야당 소속인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정무위원회)이 정부의 가계대출 규제를 오징어게임에 빗대어 강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윤 의원은 당시 "문재인 정부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 등장한) 영희처럼 착한 얼굴로 실수요자를 대상으로 선착순 대출 경쟁을 하게 하고 있다"고 질타했지요, 고 위원장은 그럼에도 "가계부채 관리는 강화돼야 하는 상황"이라며 물러서지 않았고 이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강화 등을 골자로 한 10·26 가계부채 대책을 발표했지요.

이처럼 고 위원장이 언론과 정치권의 비판을 감내하면서 묵묵히 일관된 정책 기조를 펼친 결과 올 들어 부동산 가격은 하향 안정세로 돌아섰고 가계대출 증가세도 지난해보다 한풀 꺾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오히려 주식과 암호화폐 등 위험자산 가격이 급락하고 시중 금리가 급등하면서 고 위원장도 규제보다 급변한 시장 안정에 좀더 무게를 싣는 모양새입니다.

고 위원장은 지난 28일 금융위 간부들과 시장 동향 및 리스크 요인 점검 회의를 열고 "최근 5거래일 동안 코스피가 크게 하락하는 등 다른 주요국 대비 낙폭이 과도한 측면이 있다"면서 "주요국 대비 높은 경제성장률과 1월에도 이어지고 있는 수출 호조, 기업 이익 등 우리 경제의 기초 여건이 양호한 만큼 과도한 불안 심리를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지요. 고 위원장이 이번 설연휴에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향후 금융 정책 기조를 잡아나갈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그게 영화 '빅쇼트'(2015년 개봉)는 아니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