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 세계유산 추천 日 정부 향후 전략은

사도광산 가치 '억지 홍보', 한국 주장 반박 투트랙 대응할 듯
"한일 합방의 불법성 여부가 쟁점될 것"

한국 정부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일제 강점기 조선인 노역 현장인 사도(佐渡)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을 강행하는 길을 선택한 일본 정부의 향후 대응 전략에 관심이 쏠린다. 일본 정부는 31일 외무성, 문부과학성 등 관계부처를 거쳐 1일 각의(국무회의)에서 추천 방안을 승인했다.

이로써 2015년 이후 5번째 도전 끝에 일본 내부의 추천을 얻은 사도광산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ICOMOS)의 1년 이상에 걸친 심사 결과를 근거로 내년 6∼7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등재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됐다.
◇ 일본 범정부 TF 가동…총력 대응 태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지난달 28일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추천 방침을 밝히면서 관계부처가 모두 참여하는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해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사도광산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역사적 현장인 만큼 한국 정부가 가장 강하게 반대한다.

이를 의식해 기시다 총리는 "사도광산의 높은 가치에도 이번 등재(추진)를 놓고 여러 논의와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관계 부처가 참가하는 세계유산등록 등을 위한 TF를 설치해 역사적 경위를 포함한 여러 논의에 대응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범정부 TF는 관방부의 다키자키 시게키(瀧崎成樹) 부장관보가 이끄는 것으로 결정됐다.
외무성에서 30년 넘게 활동한 다키자키는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을 지내며 일제 강점기 징용 문제 등 갈등 현안을 놓고 한국과 외교당국 간 국장급 협의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TF에는 과거사 해석 문제 등을 둘러싼 한국과 본격적인 대결에 대응하기 위해 역사와 국제법 등 다양한 분야의 민간 전문가들도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무상은 1일 기자회견에서 외무성, 문부과학성 등 관계부처가 참여하는 TF 구성을 준비하고 있다며 조속히 첫 회의를 열겠다고 말했다. 그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록을 실현하기 위해 TF를 통해 역사적 경위를 포함해 향후 심사 과정 등에서 이뤄질 다양한 논의에 범부처 차원의 대응을 강화하겠다고 덧붙였다.

"사도광산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국을 포함한 관련국과 냉정하고도 신중한 논의를 해나갈 계획"이라고도 했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는 관계부처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민관 TF를 가동하기로 해 사도광산에서의 조선인 강제노역 실체를 둘러싼 '한일전'이 국제무대에서 펼쳐지게 됐다.
◇ 일, 문화유산 가치 억지 홍보·강제노동 부인 투트랙 전략 펼 듯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관방장관은 1일 기자회견에서 사도광산이 에도시대의 산업 유산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만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사도광산이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국을 포함한 관계국과 냉정하게 논의하겠다는 생각도 밝혔다.

마쓰노 장관의 이 언급에는 문화유산으로서 사도광산 가치, 그리고 일본 측이 '한국의 독자적 주장'이라고도 하는 '다양한 이견'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들어 있다.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이 에도시대(1603∼1868년)에 장기간 일본 고유의 전통적 수공업을 활용한 산업유산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되는 일제 강점기를 제외하고 에도 시대로 국한해 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한다.

이런 주장은 향후 심사 과정에서 '꼼수'라고 비판받을 가능성이 크다.
17세기에 세계 최대 규모로 금이 산출된 사도광산은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년) 이후 기계화 시설이 도입돼 근대 광산으로 탈바꿈했고, 태평양전쟁(1941~1945) 기간에는 철, 아연 등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활용됐다.

현재의 사도광산 시설은 대체로 메이지 시대 이후 모습이고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작성한 '금을 중심으로 한 사도광산 유산군' 소개 자료에 등장하는 9개 유적 중에도 아이카와 금은산 수직갱도(1877·이하 완공연도), 아이카와 부유선광장(1938), 오마항(1892), 도지가와 제2발전소(1919) 등 4곳이 메이지 시대 이후 완공됐다.

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도 "(메이지시대) 구미(歐美)에서 도입된 선진적 광업 기술로 인해 금은 생산량이 대폭 증가해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적인 광산으로 거듭나게 됐다"고 자료에 적시됐다.
2010년 사도광산이 세계유산 추천 잠정 목록에 포함될 때만 해도 메이지 시대 이후 시설이 포함됐지만 니가타현과 사도시는 2019년부터는 일본 문화청에 제출한 사도광산 세계유산 추천서에서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까지로 한정했다.

결국 일본 정부가 에도시대로 국한해 산업유산으로서 사도광산의 가치를 계속 주장하는 것은 조선인 강제노역 문제를 피하고 넘어가려는 꼼수로 볼 수 있다.

이는 전체적인 역사 해석 전략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심사위원들의 이해를 얻을 가능성은 작다는 전망이 나온다.

마쓰노 장관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다양한 의견'은 일본 정부가 부인하는 사도광산에서의 조선인 강제노역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라는 한국 정부의 비판을 말한다.

이 문제를 놓고는 일제 강점기에 이뤄진 조선인 노동자의 동원 성격에 대해 본인 의사에 반한 '강제노동'이었다는 한국 입장과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현 일본 정부 주장이 팽팽히 맞서 타협의 여지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1939년부터 단계적으로 진행된 모집, 관(官) 알선, 징용에 의한 조선인 노무 동원이 태평양전쟁 전에 일본도 가입했던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Forced labor Convention)상의 강제노동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징집 형태로 연행된 징용조차도 국제법상 허용되는 전시 동원이라는 것이다.

특히 2015년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논란이 됐던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탄광과 마찬가지로 사도광산에서도 국제법이 금지하는 강제노동은 없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레이타쿠(麗澤)대학 객원교수는 최근 산케이신문 기고문에서 "1939년부터 이뤄진 전시동원으로 총 1천519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사도광산에서 일했다"며 "이 가운데 66%는 1천5명은 사도광업소의 모집 담당자의 현지 모집에 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제1진 모집에는 한 마을에서 20명이 할당됐는데 약 40명의 응모가 쇄도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노무 동원에 문제가 없다는 일본 정부의 인식에 대해 한일문화연구소장인 김문길 부산외국어대학 명예교수는 조선 병합을 합법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은 식민지이던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해 노역을 시킨 것에 대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일선(日鮮) 동조론'을 주장하고 한국은 병합 자체를 불법으로 보기 때문에 강제 동원을 둘러싼 인식 차가 생겼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결국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심사 과정에선 한일합방이 불법인지를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가 다시 불거질 것이라며 한국 정부 차원에서 이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