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5천㎞ 북미 종단하는 제왕나비…인간에게도 이주는 본능일까

완만한 산을 1시간쯤 오른 후 가이드가 멈춰서 사람들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곧 만나게 될 제왕나비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낮추라는 것이었다. 발걸음도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5분쯤 더 오르자 나무에 빼곡히 매달린 주황색 제왕나비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사람들 사이에서 숨죽인 탄성이 새어 나왔다.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차로 2시간쯤 떨어진 멕시코주 바예데브라보의 제왕나비 보호구역엔 해마다 겨울이면 보기 드문 장관이 펼쳐진다.

숲속 나무에 포도송이처럼 나비 떼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한낮 기온이 오르면 바람 아래 벚꽃 잎 흩날리듯 일제히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조용히 카메라 셔터만 눌러대는 사이 수많은 나비의 날갯짓이 만들어내는 작은 소리가 숲을 메운다.

나비들의 고향은 멀리 미국과 캐나다다.

알과 애벌레, 번데기 단계를 거쳐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멋진 날개를 얻은 제왕나비들은 점점 해가 짧아지고 기온이 낮아지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떠나야 할 때임을 안다. 활짝 펴도 10㎝ 정도인 작은 날개로 한참을 날아 '따뜻한 남쪽 나라' 멕시코의 중부 미초아칸주와 멕시코주의 숲에서 겨울을 난다.

나비들의 이동 거리는 최장 5천㎞에 달한다.

멕시코행을 앞두고 태어난 제왕나비들은 다른 때 태어난 나비보다 몸집도 조금 더 크고 수명도 훨씬 길다고 한다.
멕시코 숲에서 겨울을 보낸 후 3월이면 다시 북상을 시작하는데 이때는 번식도 함께 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서식지로 가는 동안 수명이 다한 나비는 죽고, 새로 태어난 나비들이 바통 터치하듯 여정을 이어간다.

마침내 고향에 도착한 나비는 지난 가을 출발한 나비의 손자, 증손자다.

올해 멕시코에 온 나비는 지난해 왔던 나비들의 까마득한 자손이다.

자기 생애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월동지와 번식지를 찾아 나비들이 매년 어김없이 수천 ㎞를 오간다는 사실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종족 보존을 위해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 본능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주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을까.

인도계 미국인 과학저널리스트인 소니아 샤는 저서 '인류, 이주, 생존'에서 인류에게 "이주는 환경 변화에 대한 아주 오래된 대응이자 숨쉬기만큼이나 필수적인 생물학적 원칙"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사막과 남미의 정글, 멕시코의 강, 지중해와 카리브해를 무모하게 건너는 수많은 이민자들도 어쩌면 이주 본능에 이끌려, 여정에 따를 위험이나 성공 확률 등을 이성적으로 계산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본능에만 이끌려 살면 질서는 무너진다.

더 잘 사는 나라라고 해서 이주민을 모두 포용하도록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간의 욕망이 이토록 강하고, 인류의 이주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단순히 막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태어나보니 대지진과 허리케인이 잇따르는 극빈국이고, 하루종일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들고, 범죄조직의 위협에 하루하루 시달린다면, 그곳에서 자녀들의 미래를 찾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곧 봄이 되면 제왕나비는 다시 북쪽으로 떠난다.

연약한 날개로 수천 ㎞를 날아가는 것이 험난할지언정 철옹성 같은 미국·멕시코 국경도 나비들에겐 전혀 장애물이 아니다.

돌아온 나비를 미국은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바예데브라보에서 겨울을 함께 보낸 제왕나비와 멕시코인 가이드의 차이점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