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베이징 간 '중화타이베이' 대만의 착잡한 심정

'중화 타이베이 굴레' 씌운 중국서 개최…2008년 '평화 무드' 때와 달라
얼어붙은 양안관계 속 중국, 대만 친중인사 불러 '통전 공세'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시장식장. 대만에 역사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여자 태권도 선수 천스신(陳詩欣)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대만인들이 그토록 고대한 첫 금메달을 목에 건 가슴 벅찬 순간이었지만 대만의 청천백일기가 아닌 '차이니스 타이베이'(Chinese Taipei·중화타이베이) 올림픽위원회 깃발이 올라가고 국가 대신 올림픽위원회 노래가 연주되면서 '나라 없는 설움'에 목이 멘 것이다.

이 장면은 중국의 힘에 밀려 '중화민국'이라는 정식 이름 대신 '차이니스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만 겨우 국제무대에 설 수 있는 대만인들의 마음속 깊은 한(恨)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1979년 미·중 수교를 계기로 대만은 1981년 이후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차이니스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만 출전하고 있다.미국이 1979년 오랜 동맹인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것을 계기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중국 올림픽위원회(Chinese Olympic Committee)라는 이름을 중화인민공화국 측에 넘기고 대만에 차이니스 타이베이 올림픽위원회라는 이름을 새로 부여했다.

그 이후로 '차이니스 타이베이'라는 이름이 대만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됐다.

대만에서는 오랫동안 중국에 속한 하나의 도시를 뜻하는 '차이니스 타이베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적지 않았다.
지난 2018년 대만에서는 '차이니스 타이베이' 대신 '타이완'(臺灣)이라는 이름으로 2020년 도쿄올림픽에 참가할 것인지를 두고 이른바 '바른 이름 되찾기' 국민투표가 진행되기도 했다.

해당 안건은 겨우 20여만표가 부족해 부결됐다.

하지만 당시 중국이 '이름 바로잡기'를 사실상의 독립 기도로 간주해 무력 시위 등 전방위 압박에 나선 상황이었기에 다수의 온건 성향 유권자들이 '개명' 자체를 반대했다기보다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 안정을 위한 대승적 차원의 '현상 유지' 선택을 했다는 해석이 많이 나왔다.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대만 스케이트 선수인 황위팅(黃郁婷)이 최근 비공식 연습 때 중국 선수가 선물로 준 중국 유니폼을 입은 행위에 왜 많은 대만인이 그렇게 격렬한 반감을 드러냈는지 그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도 하다.

황위팅은 오랫동안 교류해온 친한 중국 선수로부터 유니폼을 선물로 받아 입은 것이라면서 "스포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대만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대만을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거친 비난까지 나왔다.

중국의 한 대만인 사업가는 "황위팅이 무슨 나쁜 마음이 있을 리야 없었겠지만 중국과의 민감한 관계를 고려했을 때 너무 생각이 짧았다"며 "한국 선수가 북한이나 일본 유니폼을 입고 훈련했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한다면 대만이 '차이니스 타이베이'라는 이름을 쓰게 만든 중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하는 심경은 다른 여느 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할 때보다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올해 베이징 올림픽은 양안 관계가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40여년 만에 최악의 상황으로 전락한 가운데 열린다는 점에서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때와 상황이 또 매우 다르다.

독립 성향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지난 2016년 취임한 이후 중국은 대만과 공식 관계를 끊고 군사·외교·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수단을 동원해 대만을 거칠게 압박하고 있다.

작년 10월 중국의 국경절 연휴 때 중국은 나흘에 걸쳐 마치 당장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처럼 대만에 149대의 군용기를 들여보내 대만을 바짝 긴장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압박은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차이 총통이 2020년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성공한 것이 보여주듯이 대만에서는 반중 정서가 뚜렷하게 강해지는 추세다.

게다가 미중 전략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미국이 대중 압박 카드로서의 대만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관계를 전면적으로 강화하면서 차이 총통이 이끄는 대만 정부는 더욱 과감하게 탈중 정책을 추진해나가고 있다.

반면 베이징 하계올림픽이 열린 2008년에는 급진 대만 독립 성향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물러나고 친중 성향의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갓 집권해 양안이 데탕트 무드에 접어들던 시절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배경에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은 나중에 비록 철회되기는 했지만 당초 선수단 일정 등을 이유로 대회 개회식과 폐회식에 모두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는데 이는 중국의 체제 선전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베이징 올림픽을 바라보는 대만 측의 불편한 시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은 이번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만 측 친중 인사를 불러 통일전선 전략 차원의 공세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중국은 대만의 대표적 친중 인사인 훙슈주(洪秀柱) 전 국민당 주석을 올림픽 개막식에 초청해 환대하면서 '극소수의 독립분자'들을 제외한 '양안 화합'을 추진하는 모습을 연출하려 한다.

공산당 최고 지도부의 일원인 왕양(汪洋) 정협 주석은 급이 한참 낮다고 할 수 있는 홍 전 주석을 '친히' 만나 "대만 동포가 베이징 올림픽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은 중화의 자식들이 올림픽의 성대함과 민족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을 자국의 일개 성(省)으로 간주하는 중국은 국제적 약속인 '차이니스 타이베이'를 뜻하는 중국어 표현인 '중화 타이베이'(中華臺北)로도 성에 차지 않는 모습이다.중국 국영 중국중앙(CC)TV는 지난 4일 올림픽 개막식 선수단 입장 장면을 생중계하면서 '중화 타이베이' 팀이 입장할 때 '중국 타이베이' 팀이 입장한다고 소개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