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사] '한국 PR의 대모' 김한경 회장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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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PR협회의 창립 발기인이자 종합커뮤니케이션그룹 KPR 설립자인 김한경 회장이 향년 91세로 숙환으로 8일 별세했다.
고(故) 김한경 회장은 1931년 대구 태생으로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립대, 뉴욕 프랫대학원을 졸업한 후 뉴욕공공도서관에서 12년간 극동아시아 담당 책임자로 근무했다. 필자가 회장님을 만나게 된 것은 1987년 제일기획에 입사 하면서다. 당시 국제사업 부문 고문으로 재직중이어서 PR에 관심이 많던 회장님과 대화를 자주 나눌 수 있었다. 회장님은 레이건 대통령이 방한할 때 영부인 낸시 여사가 한국인 입양아를 미국에 데려오면서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을 보고 사회공익적 PR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어 30년만에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1989년 58세의 여성으로 당시 국내 산업분류에도 없던 PR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당시로서는 광고업으로 등록하고 KPR을 설립했다. ‘PR은 공익과 사회의 선(善)을 추구한다’는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회사를 운영하며 사회적 가치를 중시했다. 국제PR협회 한국지부, 한국PR협회, 한국PR학회등의 창립 산파역을 맡았다. 또 회장님은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기울여 최근까지도 한미우호협회, 일본홍보학회 등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영어, 일어에 능통하고 사교적이며 열정적이었던 회장님은 직원을 가족 같이 생각하고 ‘행복’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와서 그런지 33년간 회사에서 일하다 다른 직장으로 간 많은 사람들이 회장님을 자주 찾는다.회장님을 뵌 지 35년이 지난 지금 회장님이 창립하신 한국PR협회 회장으로서 그리고 종합커뮤니케이션 그룹으로 성장한 KPR의 사장으로서 회장님과 헤어짐의 순간에 선 것이 비통할 뿐이다. 회장님의 유지를 받들어 PR이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회장님의 명복을 빈다.
김주호 KPR 사장, 한국PR협회 회장
고(故) 김한경 회장은 1931년 대구 태생으로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립대, 뉴욕 프랫대학원을 졸업한 후 뉴욕공공도서관에서 12년간 극동아시아 담당 책임자로 근무했다. 필자가 회장님을 만나게 된 것은 1987년 제일기획에 입사 하면서다. 당시 국제사업 부문 고문으로 재직중이어서 PR에 관심이 많던 회장님과 대화를 자주 나눌 수 있었다. 회장님은 레이건 대통령이 방한할 때 영부인 낸시 여사가 한국인 입양아를 미국에 데려오면서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을 보고 사회공익적 PR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어 30년만에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1989년 58세의 여성으로 당시 국내 산업분류에도 없던 PR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당시로서는 광고업으로 등록하고 KPR을 설립했다. ‘PR은 공익과 사회의 선(善)을 추구한다’는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회사를 운영하며 사회적 가치를 중시했다. 국제PR협회 한국지부, 한국PR협회, 한국PR학회등의 창립 산파역을 맡았다. 또 회장님은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기울여 최근까지도 한미우호협회, 일본홍보학회 등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영어, 일어에 능통하고 사교적이며 열정적이었던 회장님은 직원을 가족 같이 생각하고 ‘행복’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와서 그런지 33년간 회사에서 일하다 다른 직장으로 간 많은 사람들이 회장님을 자주 찾는다.회장님을 뵌 지 35년이 지난 지금 회장님이 창립하신 한국PR협회 회장으로서 그리고 종합커뮤니케이션 그룹으로 성장한 KPR의 사장으로서 회장님과 헤어짐의 순간에 선 것이 비통할 뿐이다. 회장님의 유지를 받들어 PR이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회장님의 명복을 빈다.
김주호 KPR 사장, 한국PR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