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잠옷 대신 넘버5를 입어요"…세기의 연인 된 먼로의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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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프로덕트“여성들에게는 장미 향이 아니라 여성만의 향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바꾼 제품들
1920년대 유행한 향수
단순 꽃향기가 대부분
샤넬 넘버5 관행 깨고
80가지 향료 섞어
마릴린 먼로의 사랑 속
향수의 아이콘 등극
100년 지났어도
많은 패션기업에 영감
샤넬의 창업자 가브리엘 샤넬은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에게 샤넬의 첫 향수를 만들어 달라면서 이렇게 부탁했다. 1920년대 당시 향수는 장미, 바이올렛, 재스민 등 귀부인들이 좋아하는 우아한 꽃향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샤넬은 자신이 만든 향수가 ‘룰브레이커’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가슴을 조이지 않는 헐렁한 여성 상의와 여성 바지를 선보이면서 전형적인 여성상을 깬 주인공이었다. 1921년 5월 5일 현대 향수의 시초로 불리는 샤넬 넘버5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현대 향수의 시작 샤넬 넘버5
20세기 초 상류층 여성은 장미나 바이올렛 등 한 가지 꽃향기가 나는 향수를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샤넬은 인공적인 향기가 나는 향수를 만들어 전형적인 향수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조향사인 보는 전통적인 향수의 룰을 깨고 80개가 넘는 다양한 향료를 섞은 향수를 제조했다. 이렇게 탄생한 넘버5는 우아한 꽃 비누 향이 나는 향수로 이름이 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보는 샤넬에게 여러 개의 향수 샘플을 가져와 테스트했는데 샤넬이 이 중 다섯 번째 샘플을 골랐다고 해서 넘버5라는 이름 붙여졌다. 이름에서도 단순함을 선호하는 샤넬의 의도가 드러난다.향수병도 이전과는 다르게 단순하고 간결하게 바꿨다. 당시 향수병은 대개 꽃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반면 넘버5의 향수병은 투박할 정도로 미니멀하고 심플하다. 이렇게 제작된 향수병은 1920년대 이후로 여덟 번밖에 바뀌지 않는 등 아직도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샤넬은 넘버5를 대중에게 대대적으로 광고하기보다 입소문 마케팅으로 제품을 알렸다. 당시 상류층이 많이 다니는 프랑스 파리의 샤넬 매장에 넘버5 향수를 뿌리고, 그의 상류층 친구들에게 향수를 건네는 등 자연스럽게 향기를 접하도록 유도했다. 대중을 겨냥한 일반 판매보다 자신의 고객을 대상으로 한 VIP 영업을 고집한 것이다. 넘버5는 상류층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마릴린 먼로의 아이코닉 향수
샤넬 넘버5를 설명할 때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가수 마릴린 먼로를 빼놓을 수는 없다. 먼로는 “잠자리에 들기 전 샤넬 넘버5 향수 몇 방울만 몸에 걸친다”고 말할 정도로 넘버5를 사랑했다. 1960년 마리 끌레르와의 인터뷰에서도 “사람들은 내게 질문을 해요. ‘침대에서 뭘 입나요? 파자마를 입나요? 아니면 나이트가운을 입나요?’ 그래서 내가 대답했죠. 샤넬 넘버5라고요”라고 언급한 게 큰 화제를 낳으면서 넘버5는 향수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넘버5는 이렇게 한 세기를 풍미한 향수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먼로라는 뜻하지 않는 행운을 만나 유명해지면서 현대 향수의 시초 자리까지 올라섰다. 오늘날 이 향수를 맡은 사람들은 강한 비누 향과 장미 향 때문에 왠지 어머니에게서 나는 향 같다고 말한다.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향을 거의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샤넬은 넘버5를 중심으로 다양한 향수를 출시하고 있다. 샤넬의 모든 조향사는 넘버5를 기본으로 다양한 스타일 변화를 시도했다. 샤넬 넘버5의 성공은 패션회사에도 많은 영감을 불어넣었다. 넘버5가 인기를 끌자 1925년 프랑스에서는 랑방이 ‘My Sin’이라는 향수를 발매하는 등 향수산업에 뛰어들었다. 최근에는 프랑스 패션 회사 생로랑을 비롯한 대부분 패션기업이 향수와 뷰티 상품을 내놓고 있다. 넘버5가 패션회사에 남긴 족적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향수 전문가들은 샤넬 넘버5를 단순한 향수라기보다는 향수 역사 자체로 정의한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