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2시간22분 밥 먹는 佛의 '미식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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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인문학먼저 앙트레(전채요리)로 아페리티프(식전 술)와 비스킷, 아뮤즈부셰(애피타이저)가 나온다. 곧이어 수프나 포타주(고기·채소를 넣어 끓인 죽)가 등장한다. 다음은 생선. 연어나 아귀, 가자미에 마요네즈나 타르타르소스가 곁들여진다. 접시를 비우면 바닷가재 요리가 나오고, 그다음엔 육류 차례다. 소고기나 양고기 혹은 다진 고기나 채소로 속을 채운 가금류다. 강낭콩과 버섯, 찐 쌀이 고명 역할을 한다. 원형으로 썰어 토스트 위에 얹은 푸아그라까지 마치면 한입 크기의 프티푸르(케이크), 과일을 곁들인 마카롱과 마들렌이 눈까지 즐겁게 한다.
김복래 지음
헬스레터
663쪽│3만4800원
《미식 인문학》은 중세부터 앙시앵레짐, 혁명기, 벨 에포크를 거쳐 현대까지 연대기별로 미식(美食)의 나라 프랑스의 음식문화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살펴본 책이다. 어렵고 낯설게만 보이는 ‘프렌치 요리’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역사적·사회경제적 관점에서 파헤친다.이탈리아인은 옷에, 독일인은 집에, 프랑스인은 음식에 평생을 바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랑스에서 음식은 큰 의미를 지닌다. ‘종교’에 비견될 정도다. 프랑스인의 하루 평균 식사 시간은 무려 2시간22분에 달한다.
프랑스인에게 식사는 단순히 먹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집단적인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엄격한 계율의 형태를 띤 다양한 에티켓, 정해진 식사 시간을 통해 프랑스인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구르메(먹고 마시는 것을 감식하는 전문가)와 가스트로놈(좋은 요리를 사랑하는 애호가)이 수없이 많을 수밖에 없다.프랑스 요리 정체성의 핵심은 ‘세련화’다. 요리 과정의 특수성, 식자재의 기원 및 특수한 테루아(토양), 전래되는 요리 비법에 대한 관심, 와인과의 페어링과 같은 오묘하고 비범한 음식 궁합을 추구한다.
프랑스 요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까지 크고 작은 변동이 끊이지 않았다. 중세 프랑스 요리는 향신료 범벅이었다. 고기의 부패를 감추는 일종의 위장 전술이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눈에 띄는 화려한 장식을 중시했다. 샤를 5세의 수석 요리사 기욤 타렐이 쓴 《르 비앙디에》(1300년)에는 컬러풀한 소스와 도금된 금속 잎사귀로 고기를 풍미 있게 보이는 법이 상세히 담겼다.
프랑스인들은 14세기까지 접시라는 것을 전혀 사용할 줄 몰랐고 손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 먹었다. 1533년 프랑스 왕가에 시집온 메디치가의 카트린 드 메디치는 식탁 문화의 혁명을 일으켰다. 날렵한 포크와 나이프, 정갈하게 접힌 새하얀 냅킨을 사용하는 테이블 매너가 탄생했다. 카트린은 당시까지 프랑스인들이 열광하던 신맛 선호와 함께 야만적인 식습관도 끝장냈다.루이 14세 시절엔 고급 요리의 대명사인 ‘오트 퀴진’의 전통이 수립됐다. ‘음식의 자연스러운 맛을 최대한 살리자’는 경향이 강해졌고 향료 대신 허브나 국소적인 양념, 쌉싸름하고 톡 쏘는 맛의 겨자를 선호했다. 루이 14세는 코스 요리에 정찬 개념을 도입했다. 앙트레와 로스트 및 샐러드, 앙트르메(로스트와 디저트 사이에 먹는 가벼운 음식). 디저트(과일)로 세분화한 20가지 이상의 다양한 요리는 사람들의 눈과 입을 황홀하게 했다.
대혁명은 프랑스 요리를 유럽 각국으로,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널리 퍼뜨렸다. 귀족 저택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은 잇달아 레스토랑을 열었다. 귀족의 생활양식을 따라 하기 바빴던 부르주아들은 앞다퉈 미식에 지갑을 열었다. 레 밀 콜론, 라메종 카렘, 카페 드 라 페 같은 유명 레스토랑에는 조르주 상드, 알퐁스 드 라마르틴, 빅토르 위고 같은 명사들이 드나들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는 프랑스 미식 문화의 황금기였다. 고운 꽃으로 장식하고 하얀 보가 깔린 식탁 위에 접시 오른쪽엔 날을 접시 쪽으로 누인 나이프를, 왼쪽에는 날을 위로 향하게 한 포크를 놓는 법이 확립됐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물잔, 레드와인 잔, 샹파뉴 잔의 순서대로 유리잔을 놓아야 했다.맛있는 요리와 유명 셰프, 진정한 맛을 찾아 나서는 미식가들의 삶을 담은 책은 화려한 도판과 어우러져 한편의 ‘먹방 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다. 자연스레 ‘보나페티!(맛있게 드세요!)’라는 소리가 들리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는 것 같은 착각에도 빠져본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