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느린 곳에 숨어있다

한경 CMO Insight

광고에서 채굴한 행복 메시지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한국광고학회 제24대 회장)
김병희 서원대 교수
나이를 먹어갈수록 인생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된다. 돌아가면 어떠랴, 조금 느리게 가면 어떠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초중고 때 공부를 잘했던 사람이 행복의 성적표를 잘 받는 것도 아니다.공부를 못했던 사람도 공부를 잘했던 사람도, 자신의 인생길에서 어떤 방향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행복의 크기도 결정되는 것 같다. 지름길로 앞서 간다고 해서 늘 행복한 것도 아니며, 돌아서 천천히 가더라도 나중에 더 행복한 인생을 사는 분들도 많다.

제일기획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관광공사, 티맵모빌리티와 공동으로 느린 길을 안내하는 슬로우 로드(Slow Road) 내비게이션 캠페인을 진행했다.

목적지까지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하지 않고, 천천히 여러 곳을 거쳐 가도록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캠페인이다. 내비게이션은 대체로 운전자에게 최적의 빠른 길을 안내하는데, 그 기능을 뒤집은 역발상 아이디어였다.고정관념을 깬 이 캠페인은 코로나19 시기에 여행객이 제주도로 몰리는 상황에 맞춰, 여행객이 제주도의 다양한 매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제주관광공사의 ‘슬로우 로드’ 캠페인(2021)에서는 빨리 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멀리 돌아가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영상은 제주도의 숨은 풍광을 보여주며 느릿느릿 흘러간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영상이 흘러가자 거기에 맞춰 감미로운 목소리가 따라 흐른다.성우 선호제 씨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전달하는 카피는 이렇다.

“모든 내비게이션의 목적은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하는 것. (기계음: 경로를 다시 탐색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계획에 없던 우연한 풍경이 마음에 오랜 흔적을 남기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느리지만 아름다운 길로 당신을 안내합니다. 가장 빠른 길 대신 느리지만 가장 아름다운 길을 안내하는 여행자의 내비게이션, 슬로우 로드. 목적지를 잠시 잊거나 멀리 돌아가도 괜찮아요. 여행이잖아요. 느리지만 아름다운 여행자의 내비게이션- 슬로우 로드(Slow Road)”
제주관광공사의 ‘슬로우 로드’ 캠페인(2021)
제주관광공사의 슬로우 로드 서비스는 여행객들이 경로를 선택하면 제주공항, 중문, 서귀포, 성산 등 제주도의 7개 권역에 걸친 50개 경로를 제공한다.경로에 따라 적게는 5곳에서 많게는 11곳을 거쳐 가는 우회길이 슬로우 로드 내비게이션의 매력이다.

예컨대, 제주공항에서 성산일출봉으로 간다면 내비게이션은 보통 97번 도로와 1119번 국도를 거치는 빠른 길을 추천한다.

하지만 슬로우 로드 내비게이션은 40여 분이 더 걸리지만 아침미소목장, 한라생태숲, 안돌오름 등을 거치는 경로로 안내해준다.

여행객이 슬로우 로드를 따라가면 숨겨진 비경(秘境)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 외에도 곳곳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것이다.

슬로우 로드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면 관광객을 제주의 다양한 장소로 분산시킬 수 있어, 제주관광공사에도 도움이 된다.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곳을 여행할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번잡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을 즐기도록 배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캠페인 영상을 보면 즉시 제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빠른 길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우회로를 안내한 역발상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 캠페인은 2021 부산국제광고제에서 4개 부문을 수상했고, 2021 대한민국광고대상에서 프로모션 대상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부문의 금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창의성도 인정받았다.

이 캠페인에서는 우리는 느리게 사는 행복을 엿볼 수 있다. 목적지를 잠시 잊거나 멀리 돌아가도 괜찮다고 한다. 느린 여행의 진정한 가치를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느리게 사는 행복의 의미가 떠오른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는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2014)에서, 급변하는 세상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한가로이 거닐며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느림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 문제라고 그는 주장했다.

세상은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간다. 사람들도 디지털 문명을 받아들이느라 너무 열심히 살아간다. 이것저것에 쫓겨 너무 허둥대며 살아가는 분들도 많다.

그런데도 행복하지 않다. 정해진 틀 속에서 모두가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경로를 잠시 이탈하면 어떠랴. 느린 길을 선택해 천천히 가면 어떠랴.우리네 인생에서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되돌아보면 많은 것들이 우연한 기회에 결정됐다.

슬로우 로드 캠페인의 카피처럼, 가장 빠른 길 대신 느리지만 가장 아름다운 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우리들이 그 길을 찾지 않았거나 애써 피해왔는지 모를 일이다. 진짜 행복은 어쩌면 느린 곳에 숨어있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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