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나쁜' 물가 상승 불러온 日 금융완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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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 향상 없는 비용상승 인플레거품경제가 꺼진 1990년대 초부터 일본은 물가 하락(디플레이션)을 겪어왔다. 경제정책 목표도 ‘디플레이션 악순환’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물가 하락→기업 이윤 저하→임금 하락→구매력 감소→물가 하락’이라는 악순환의 늪에 빠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본에서 요즘 제품가격을 인상한다는 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몇몇 제품의 물가상승폭을 보면, 간장이 4~10%, 햄이 4~12%, 마요네즈가 3~9% 등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경기불황 탈출 신호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불황 탈출 신호탄으로 보기 어려워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경제학 교수
중앙은행의 핵심 역할은 물가 안정이다. 대부분 국가에서는 급격한 물가 상승 ‘억제’에 주안을 둔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은행의 목표는 물가 상승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뽑아 든 화살이 ‘통화량 증대’, 즉 돈 풀기였다. 특히 2013년 초부터 시작된 경제정책(아베노믹스)의 가장 큰 특징은 ‘대담한 금융완화’였으며, 현 기시다 후미오 정권에서도 그 기조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행은 2%의 물가 상승이 달성될 때까지 돈을 풀겠다며 국채를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작년 9월 말 시점 국채 보유자별 비중에서 일본은행은 48.1%를 차지한다(일본은행 자금순환통계).돈 풀기의 정책 논리는 ‘통화량 확대→엔화 가치 하락(환율 상승)→수출기업의 이윤 증가→임금 상승→구매력 증대→물가 상승’이었다. 정책 시행 후 당분간은 수출기업의 이윤을 증가시켰지만, 기업은 내부유보를 늘렸고 임금 올리기를 주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엔화 가치 하락에 따른 이윤 증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조업의 생산성은 1990년 주요 31개국 중 1위를 자랑했으나 2019년에는 18위로 추락했다(OECD 자료). 디지털 정보통신기술(ICT)에서 열세를 보이는 일본에서 제조업의 생산성 약화는 성장엔진 상실을 뜻한다.
구매력 평가로 본 2020년 일본의 평균임금은 424만엔으로 1990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OECD 자료). 2020년 미국의 평균임금은 763만엔으로 일본의 1.8배, 한국도 일본보다 38만엔이 많은 462만엔에 이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왜 임금 증가 없이 물가가 오르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코로나19 및 우크라이나 위기와 같은 정세 불안과 함께 대담한 금융완화로 인한 엔화 약세가 수입 원유와 원자재 가격 상승을 가져왔고, 그것이 소비자 물가에 반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에는 ‘괜찮은’ 물가 상승과 ‘나쁜’ 물가 상승이 있다. 노동생산성 향상에 따른 임금 상승이 구매력을 증대시켜 물가가 오르는 것은 용인할 수 있는 ‘괜찮은’ 물가 상승이다. 이와 달리 소득은 늘어나지 않음에도 원자재나 상품 구매 가격이 올라 발생하는 물가 상승은 실질소득을 낮춘다는 점에서 ‘나쁜’ 물가 상승이다. 요즘의 물가 상승은 생산성 향상이 없는 비용상승 인플레이션이라는 의미에서 ‘나쁜’ 물가 상승의 징조라 할 수 있다.
돈을 풀면 경제가 좋아질 거라 보는 것도 풀린 자금이 실물투자를 증가시키고 그것이 소득 증가로 이어질 때 가능하다. 일본 경제의 큰 문제점은 이자율이 0%에 가까워 차입 비용이 낮고 돈이 남아도는데도 수익성 높은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화 진행에 대한 발 빠른 대응이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것임을 일본 정책 당국도 인지하고 있으나, 실제 형태는 아날로그적 사고에 머물고 있다는 데 그 우울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