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알맹이 없는 스타트업 육성 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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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 실리콘밸리 특파원최근 만난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국계 스타트업 창업자 A씨와 B씨는 공통점이 많다. 한국 최고 학부를 졸업한 뒤 해외 유명 대학에서 공부했고, 구글 등 세계적인 테크기업 본사에서 일하다가 스타트업을 차렸다. 타국에서 맨주먹으로 회사를 일구다 보니 고생길을 걷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실리콘밸리 외곽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면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모르겠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미국에서 창업한 걸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다. 도전을 격려하고 대박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실리콘밸리의 문화 때문이다.
도전 격려하는 문화 필요
도전은 창업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해 실리콘밸리 특파원 부임 초기 기자가 만난 한 스타트업의 최고운영책임자 C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글로벌 투자은행(IB) 출신으로 미 서부 최고 명문대 경영전문대학원 석사(MBA)를 마치고 투자기관에서 일하다가 스타트업에 합류했다.“왜 이름 있는 기업에서 일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MBA 동기들의 첫 번째 목표는 창업, 두 번째는 유망 스타트업 합류”라고 답했다. 또 “실리콘밸리에선 도전하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평가한다”며 “빅테크나 컨설팅 기업 입사는 2순위”라고 말했다.요즘 한국도 실리콘밸리식으로 변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녔던 D씨는 회사 지원을 받아 미 명문대 MBA까지 마치고 최고 인재들이 모여 있는 팀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는 1억원 넘는 대학원 학비 반납을 감수하고 최근 사표를 썼다. 이유를 물으니 “30대 후반인 지금 스타트업에서 도전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공기업, 대기업의 인기가 높은 한국에서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건 창업자들의 크고 작은 성공 스토리가 쌓이고 있는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에서도 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을 뜻하는 ‘유니콘’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미국 증시 상장이나 기업 매각 등을 통해 거부 반열에 올라선 기업인이 늘고 있다. 스타트업에서 도전하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실리콘밸리 찾아가 배워야"
자생적으로 생겨난 도전의 싹에 물과 비료를 주는 것은 정치권의 역할이다. 하지만 산업계에선 “정치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스타트업 산파를 자처하고 있는 차기 대통령 후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너도나도 ‘한국판 실리콘밸리’ 조성과 규제 개혁을 말하지만 이는 지난 대선에서도, 그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말만 번지르르했지 알맹이는 없다는 평가가 우세하다.한 실리콘밸리 창업자는 “한국과 미국의 창업 환경을 비교하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개선을 약속한 후보는 없다”고 비판했다. 다른 스타트업 직원은 “도전, 실패에 대한 용인, 공유와 협력 등 실리콘밸리 문화를 어떻게 한국에 뿌리내리게 할지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한마디로 ‘디테일’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판 실리콘밸리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현장에 와보지 않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공약을 만들었기 때문이란 지적이 많다.
역대 대통령 중 참모들과 함께 실리콘밸리를 직접 찾은 사람은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유일하다. 김대중 정부의 벤처 정책이 가장 현실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디테일은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육성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기인 만큼 차기 대통령의 실리콘밸리 방문 소식을 올해 꼭 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