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에 "저렴하다" 2차 가해…"그 가족은 지옥"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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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여고생 극단선택…법원 "피고인 가족도 비난 가담해 고통 줘"
성폭력 PTSD 위험 32배↑…"살아도 죽은 삶…심리 부검 필요" "그 가족 자체가 나에게는 지옥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고 행복하고 싶은 게 욕심이 많은 거야…?"
2019년 6월 성폭행 피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지난해 4월 극단적 선택을 한 여고생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가해자뿐만이 아니었다.
피해 여고생 A양이 남긴 일기장 등에는 사건 이후 겪었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이 그대로 담겼다.
그런데도 A양은 어떻게든 피해를 극복하려 했지만, 가해자의 가족들은 가해자를 두둔하며 피해자를 험담하고, 피해자에게 송곳 같은 말을 내뱉으며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다. 법원은 가해자 B(당시 18)군 가족이 A양에게 2차 가해를 한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B군의 형량을 2심에서 징역 9년까지 늘렸으나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B군의 형량을 7년으로 줄였다.
15일 A양의 유족이 제출한 피해 증거자료와 해당 사건의 판결문 등에 따르면 성폭행 사건 발생 이후 B군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서 "솔직히 성관계할 때 명확히 '하자'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B군의 아버지는 학폭위에서 '아버지로서 B의 말을 믿는다. 학교에서도 B를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정말 성폭행이 맞는지 정확히 밝히고 싶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의 어머니는 학생부장을 통해 A양 가족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가 불과 몇 시간 후 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번복했다. A양과 같은 반이었던 B군의 여동생은 '오빠가 불쌍하다'며 A양을 험담했다.
B군의 누나는 A양의 친구가 B군의 범죄사실을 따져 묻자 '남친 여친 사이에 강간 성폭행이란 게 존재하나.
내 동생만 쓰레기 만드느냐. 저렴하구나' 등 되레 따지고 조롱했다고 유족은 전했다. 이로 인해 A양은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무렵 A양이 쓴 일기장에는 무기력함, 우울감,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찼다.
로봇이 된 것만 같았고, 잠이 오지 않았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어졌고, 현기증이 심해졌고, 잔인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고 적었다.
A양은 "그 가족들은 정말 겨우 버티고 살아가는 여자아이에게 죄를 넘기며 가볍게 말하고, 여자아이 잘못인 것처럼 탓하고, 스스로를 ○○라는 생각이 들게끔 말하고, 겨우 낭떠러지에서 버틴 아이는 밀려서 떨어졌습니다"며 불안감을 호소했다.
또 "더 망가지는 게 무서워서 용기를 내서 신고했지만, 학교 사람들은 이때까지 착하고 성실했던 그 남학생을 걱정하고 위로하고 옹호해주며 '그쪽에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신고 안 할 생각이었냐'고 여러 번 되묻기도 합니다"고 억울함을 비쳤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가족들도 피해자에게 '피고인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취지로 연락하는 등 2차 피해를 가했다"고 지적했다.
2심 역시 "학폭위 불복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고인과 그 가족들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등 2차 피해를 가함으로써 고통을 주었다"고 판단했다.
2019년 발표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연구팀의 연구 결과 성폭력 피해 여성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발병 위험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32배 높았다.
강박 장애(27.8배), 니코틴 의존증(22.4배), 광장공포증(19.6배), 불안장애(13.3배) 등도 성폭력 피해를 겪지 않은 여성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PTSD 수준은 전쟁을 경험한 환자와 맞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윤경 강원여성연대 상임대표는 "피해 여성들이 살아가기 힘든 건 직접적인 가해는 물론 그 이후에 일어나는 주변인들의 2차 가해"라며 "살기는 살지만 어쩌면 죽은 삶을 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은 피해 사실만 조사할 게 아니라 2차 가해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며 "성폭력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그 원인을 추정·검증하는 심리 부검을 한다면 법원에서 '직접적인 피해가 아니다'라는 말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폭력 피해자들 대부분이 주변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고립감이나 외로움을 느끼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다"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성 인지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의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이나 이 사건 파기환송 이유를 보면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퇴보한 것 같다"며 "수사·사법 기관은 2차 가해가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심각함을 인식하고, 이를 제재 또는 중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연합뉴스는 B군의 변호인을 통해 B군 가족 측에 이 사건에 관한 입장을 물었으나 별다른 입장을 전해오지 않았다.
/연합뉴스
성폭력 PTSD 위험 32배↑…"살아도 죽은 삶…심리 부검 필요" "그 가족 자체가 나에게는 지옥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고 행복하고 싶은 게 욕심이 많은 거야…?"
2019년 6월 성폭행 피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지난해 4월 극단적 선택을 한 여고생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가해자뿐만이 아니었다.
피해 여고생 A양이 남긴 일기장 등에는 사건 이후 겪었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이 그대로 담겼다.
그런데도 A양은 어떻게든 피해를 극복하려 했지만, 가해자의 가족들은 가해자를 두둔하며 피해자를 험담하고, 피해자에게 송곳 같은 말을 내뱉으며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다. 법원은 가해자 B(당시 18)군 가족이 A양에게 2차 가해를 한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B군의 형량을 2심에서 징역 9년까지 늘렸으나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B군의 형량을 7년으로 줄였다.
15일 A양의 유족이 제출한 피해 증거자료와 해당 사건의 판결문 등에 따르면 성폭행 사건 발생 이후 B군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서 "솔직히 성관계할 때 명확히 '하자'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B군의 아버지는 학폭위에서 '아버지로서 B의 말을 믿는다. 학교에서도 B를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정말 성폭행이 맞는지 정확히 밝히고 싶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의 어머니는 학생부장을 통해 A양 가족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가 불과 몇 시간 후 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번복했다. A양과 같은 반이었던 B군의 여동생은 '오빠가 불쌍하다'며 A양을 험담했다.
B군의 누나는 A양의 친구가 B군의 범죄사실을 따져 묻자 '남친 여친 사이에 강간 성폭행이란 게 존재하나.
내 동생만 쓰레기 만드느냐. 저렴하구나' 등 되레 따지고 조롱했다고 유족은 전했다. 이로 인해 A양은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무렵 A양이 쓴 일기장에는 무기력함, 우울감,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찼다.
로봇이 된 것만 같았고, 잠이 오지 않았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어졌고, 현기증이 심해졌고, 잔인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고 적었다.
A양은 "그 가족들은 정말 겨우 버티고 살아가는 여자아이에게 죄를 넘기며 가볍게 말하고, 여자아이 잘못인 것처럼 탓하고, 스스로를 ○○라는 생각이 들게끔 말하고, 겨우 낭떠러지에서 버틴 아이는 밀려서 떨어졌습니다"며 불안감을 호소했다.
또 "더 망가지는 게 무서워서 용기를 내서 신고했지만, 학교 사람들은 이때까지 착하고 성실했던 그 남학생을 걱정하고 위로하고 옹호해주며 '그쪽에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신고 안 할 생각이었냐'고 여러 번 되묻기도 합니다"고 억울함을 비쳤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가족들도 피해자에게 '피고인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취지로 연락하는 등 2차 피해를 가했다"고 지적했다.
2심 역시 "학폭위 불복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고인과 그 가족들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등 2차 피해를 가함으로써 고통을 주었다"고 판단했다.
2019년 발표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연구팀의 연구 결과 성폭력 피해 여성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발병 위험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32배 높았다.
강박 장애(27.8배), 니코틴 의존증(22.4배), 광장공포증(19.6배), 불안장애(13.3배) 등도 성폭력 피해를 겪지 않은 여성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PTSD 수준은 전쟁을 경험한 환자와 맞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윤경 강원여성연대 상임대표는 "피해 여성들이 살아가기 힘든 건 직접적인 가해는 물론 그 이후에 일어나는 주변인들의 2차 가해"라며 "살기는 살지만 어쩌면 죽은 삶을 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은 피해 사실만 조사할 게 아니라 2차 가해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며 "성폭력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그 원인을 추정·검증하는 심리 부검을 한다면 법원에서 '직접적인 피해가 아니다'라는 말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폭력 피해자들 대부분이 주변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고립감이나 외로움을 느끼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다"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성 인지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의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이나 이 사건 파기환송 이유를 보면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퇴보한 것 같다"며 "수사·사법 기관은 2차 가해가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심각함을 인식하고, 이를 제재 또는 중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연합뉴스는 B군의 변호인을 통해 B군 가족 측에 이 사건에 관한 입장을 물었으나 별다른 입장을 전해오지 않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