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실적 귀띔' LG생건, 미숙한 투자자 소통

발표전 애널에만 '분위기' 전달
결국 불성실 공시법인 지정

이슬기 증권부 기자
지난달 10일 LG생활건강 주가는 10% 넘게 하락했다. 외국인과 기관들이 처분하는 주식을 개인투자자들이 모두 사들였다. 당시 한 펀드매니저에게 주가 급락 이유를 물었더니 “LG생활건강이 전주 금요일(1월 7일) 장 마감 후 애널리스트들에게 4분기 실적에 대한 프리뷰 미팅을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4분기 실적이 예상보다 훨씬 부진할 것 같으니 정확한 숫자는 제외하고 분위기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기업설명회(IR) 담당자로선 시장이 실적 악화를 예견하지 못한 채 예상을 훨씬 밑도는 성적표를 받아들였을 때의 충격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시장관계자가 LG생활건강의 행위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금요일 장 마감 후 알렸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주 월요일 개장 전 증권사 7곳이 프리뷰 미팅을 반영한 보고서를 냈다는 이유에서다. 미공개정보 이용에 대한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는 명확한 공시 위반이다. 상장사의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실적만큼 중요한 게 없다. 이 때문에 실적과 관련한 중요 사항은 알음알음 알려선 안되고 모든 투자자에게 투명하게 공시해야 한다. 숫자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매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면세점 실적이 안 좋을 것이라고 알려준 건 결국 어느 정도 숫자를 밝힌 것과 다름없다. 결국 15일 LG생활건강은 공시불이행으로 불성실공시법인에 지정됐다. 800만원의 제재금도 부과됐다.

미국 상장사들의 상당수는 분기 실적을 발표할 때 다음 분기 실적 예상치(가이던스)를 함께 발표한다. 전 분기에 제시했던 예상치를 크게 웃돌거나 밑돌 것 같으면 예상치를 수정하는 공시를 또 낸다. 수정 공시를 통해 시장에 미리 실적을 반영시켜가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분기 예상치를 공시로 제공하는 회사가 거의 없다. 매년 말 내년 한 해의 실적 예상치를 제시하는 정도다. 분기 예상치를 공시하지도 않으니 예상치를 조정한 공시를 내서 시장에 반영시킬 수 없는 구조다.

2014년 증권가는 CJ ENM 공시 사전 유출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장사들이 실적을 미리 애널리스트들에게 귀띔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문제가 커지자 실적은 공시를 통해 공정하게 알리는 문화가 정착했다. 이번 LG생활건강의 미숙한 투자자 소통 역시 한국 IR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명확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상장사들이 시장과 알음알음 소통하지 않고 공시를 통해 보다 투명하게 소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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