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닮고 싶다"…구글·테슬라 티셔츠 수집하는 한국 외교관 [황정수의 인(人) 실리콘밸리]

(14) 이원강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영사

코로나19 뚫고 순회영사 출장
정책 안내 위해 유튜브 생방송 진행

행시 출신 서울시 에이스 공무원
영사로서 고객 접하며 '현장' 배워

총영사관 중 구글 평점 1위로 끌어올려
"실리콘밸리 기업 문화 배웠다"
콜로라도 순회영사 근무 때의 모습
이원강 영사(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행시 49회)의 실리콘밸리 산마테오 자택에 갔을 때 그가 기자를 먼저 데려간 곳은 2층 옷방이었다. 옷장 안엔 구글, 테슬라, 엔비디아, 스페이스엑스, 몰로코 등의 회사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등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그가 실리콘밸리 한국인들을 만났을 때 반강제(?)로 바꿔 입거나 선물 받은 것이다. 이 영사는 '보물'이라고 했다.

그가 옷에 욕심낸 건 이유가 있다. 실리콘밸리 빅테크나 스타트업 직원들을 '닮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영사는 "문제에 도전하고 협력해서 해결하는 실리콘밸리의 문화가 정말 좋았고 결국 동경하게 됐다"며 "단순히 벤치마킹해보고 싶다는 수준을 벗어나 나중엔 '실리콘밸리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이 영사는 공관 업무를 처리할 때도 실리콘밸리 사람처럼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외공관 고위 공직자 특유의 체면과 격식은 내려놓고 '고객 서비스'를 1순위에 올렸다.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순회영사를 돌고 정책 홍보를 위해 유튜브 생방송을 한 게 대표적이다. 실리콘밸리 주재원 환송회 등에도 꼭 참석해 동포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난해 7월1일 '자가격리 면제 조치' 시행 땐 공관에서 혼자 5일 넘게 밤을 새며 업무를 처리했다. 이 영사의 활약상은 북캘리포니아 한인사회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교민들 사이에선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 주재원들에겐 '브라더'로 불렸던 이 영사가 오는 20일 임기를 마치고 원 소속인 서울시로 복귀한다. 그가 겪은 실리콘밸리 3년의 소회를 들어봤다. 이 영사는 "교민들로부터 받은 응원과 감동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실리콘밸리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나를 발전시키고 도전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

"펜데믹에도 동포 민원은 처리해야"...코로나 뚫고 유타, 콜로라도로 순회영사

▶서울시 소속 공무원이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서 나온 계기는요“서울시와 외교부가 인사 교류를 합니다. 제가 서울시 출신 세 번째 샌프란시스코 영사입니다. 2019년 2월20일에 부임했습니다.”

▶어떤 업무를 주로 하셨나요

“처음 8개월은 동포 관련 업무를 했습니다. 공관 영사 정원이 줄면서 막내가 하는 ‘운영지원영사’를 제가 지원해서 맡게 됐습니다. 공관에 희생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콜로라도 순회영사 때 받은 공로패
▶2020년 8월부터는 민원영사도 맡으셨죠

“네. 민원영사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순회영사’입니다. 공관이 없는 지역에 가서 여권접수, 공증접수 등 동포들의 민원 업무를 처리해주는 것이죠. 콜로라도, 유타에 가게됐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 확산되던 시기에 순회영사를 가는 게 맞냐’는 일부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회영사를 기다리는 교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죠. 당시 총영사님과 저, 다른 영사 한 명, 운전 담당 직원 한 분 등 총 4명이 비행기가 아닌 차를 몰고 유타랑 콜로라도를 돌기로 했습니다.”

▶민원 업무를 전문 직원이 아닌 영사가 직접 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은 없었나요“3년은 해야 민원 업무가 익숙해진다는 얘기도 있었죠. 하지만 저는 순회영사 출발 전까지 20일 밖에 없었어요. 서둘러서 1000페이지에 달하는 지침을 숙지하고 갔습니다. 유타에서 120분, 콜로라도에서 300분 만나서 직접 해보니 크게 어려운 것이 없더라고요. 영사도 현장 업무를 직접 해봐야한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였습니다.”
*당시 재외동포신문엔 이원강 영사를 포함한 순회영사단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는 기사와 영상이 실렸다.

공관 서비스 개선했더니 구글 평점 4.1...'미국 총영사관 중 1위' 달성

▶복귀 후에 공관 민원업무를 개선하는데 주력했다고요

“네. 공관 서비스 수준은 구글맵 평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민원영사를 맡았을 때 평점이 3.4였습니다. ‘불친절하다’, ‘느리다’ 등의 평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동포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해외공관이 서울시 주민센터보다 떨어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우선 평점 목표를 3.7로 잡고 공관 서비스를 끌어올려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무엇부터 바꾸기 시작했나요

“고객 편의를 우선시하는 관점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주민센터나 한국의 은행 창구처럼 번호표 제도부터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동포들이 서류를 복사할 일이 많기 때문에 복사기도 2개를 갖다 놨죠. 그리고 카드 결제 시스템도 도입했죠.”
지난해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자가 격리 면제' 관련 업무로 인해 밤을 새며 공관에서 일 할 때의 모습
▶번호표, 카드결제 등이 안됐었다는 게 놀랍네요.

“네, 그리고 코로나19 시기인데 민원창구가 북적북적하고, 거리두기도 안 되고 있었죠. 생각한 게 ‘예약제’입니다. 예약제를 도입하고 나서 직원들도 편해졌고 동포들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됐습니다. 공관 주차문제도 약간 해결이 됐고요.”

▶그래서 생각했던 목표는 달성하셨나요

“네. 제가 취임 때 구글맵 평점이 3.4점이었습니다. 3.7점까지만 만들자고 했죠. 지금은 4.1점까지 올라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평점이 미국 내 대한민국 총영사관 10곳 중에서 1등, 전체 대한민국 공관 14개 중에선 2등입니다.”

동포 편의 위해 5일 밤새웠더니 총영사관에 커피, 케익 선물 쏟아져

▶사람들이 ‘이원강 영사’ 하면 지난해 코로나19 격리면제 때의 활약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지난해 6월13일이었을겁니다. 국무총리께서 ‘코로나19 격리면제 조치를 7월1일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직계가족을 방문하는 경우 2주 간의 자가격리를 면제하는 조치였죠. 걱정이 컸습니다. 솔직히 각 공관은 준비가 안 돼 있었거든요. 하지만 교민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이보다 좋은 제도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왕 하는 거 잘 준비하자’고 마음 먹고 교민들게 ‘지금 지침이 없으니까 전화, 이메일 주시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공지했습니다. 교민들께서 제 지침을 잘 따라주시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죠.”

▶앞이 컴컴했을 것 같아요.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저는 6월 하순에 콜로라도와 유타로 순회영사를 다시 다녀와야하는 상황이었어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죠. 그리고 준비를 잘 해도 7월1일부터 서류가 쏟아져들어올 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없었어요. 민원실 직원을 총 동원해서 다섯명에서 하루에 30개씩 작업을 한다고해도 겨우 150개잖아요. 그런데 서류는 800개 이상이 들어올 걸로 예상했거든요. 영사관에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야 교민들도 차질 없이 한국으로 입국하실 수 있을텐데, 걱정이 컸어요.”

▶힘든 상황에서 떠올린 묘책이 무엇인가요.

“‘교민들께서 제출 서류를 완벽하게, 잘 작성해주신다면 저희가 한 건 당 업무 처리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유튜브 방송이 떠오르더군요. 교민들께 상세하게 상황을 알리고 절차를 설명했습니다. 행정학 이론 중에 ‘거버넌스 이론’이 있어요. 민과 관이 힘을 합쳤을 때 최고의 효과가 난다는 거죠. 고객의 협조가 있어야 최고의 서비스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적용해보고 싶었어요.”

▶방송은 어떻게 구성했나요.

“영상의 테마를 4개로 잡았어요. 우선 교민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고요, 저희 민원직원들이 어떻게 일하는 지도 말씀을 드렸죠. 세번째로 ‘서류작성법’을 전달했고요 마지막으로 질의응답을 받았어요. 30분 이상 유튜브 생방송을 했습니다. 방송할 때는 몰랐는데, 2만명 정도가 시청을 하셨고 실시간 댓글로 ‘고맙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효과는요

“서류의 90% 이상이 완벽했어요. ‘대한민국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밤을 5일 이상 꼬박 세웠다면서요

“순회영사 업무 마무리 때문에 직원 2명만 데리고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직원들은 주52시간 근무 제한 때문에 귀가를 했지만, 저는 영사관에서 5일 정도 밤을 세웠습니다. 제가 공관에서 울면서 기도를 하면서 ‘저에게 힘과 용기를 달라’고 계속 혼잣말을 했는데 힘들어하던 직원들이 제 기도를 듣고서 힘을 내더라고요.”
자가격리 면제 안내 유튜브 영상
▶교민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던데요.

“네, 아침에 공관 앞에 선물이 와있었어요. 커피가 오고요, 음식 배달이 왔어요. 영사관이 영사관답게 일을 하니까 도덕적 우위에 서게 되고, 고객을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모든 게 변하게 되더라고요. 정말 ‘아름다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도 10월쯤 되니까 번아웃이 오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운이 좋은지 격리면제 조치가 해제됐습니다.”

▶총영사관 근무를 통해 많은 걸 배우셨을 것 같아요.

“전 4급 공무원인데, 9급 공무원처럼 일했어요. 순회영사로 여권 접수를 받으면서 바닥을 해봤죠. 행정고시출신들이 약하다고 평가되는 바닥 업무를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을 잡았어요. 그리고 저는 15년 공직에 있으면서 주로 기획일을 했어요. 대민은 이번이 처음이었죠. 고객을 향한 마음을 갖고 가니까 ‘낭중지추’처럼 제 마음이 드러나고, 이를 알아주시더라고요. 행정이 변해야한다는 생각을 해요. 고객 중심으로요. 그리고 실리콘밸리하면 ‘도전’ 이잖아요. 제가 느낀 감동을 잊지 않고, 계속 이런 사례를 만들어가고 싶다, 공직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계속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었어요.”

서로 돕고 협업하고 도전하는 실리콘밸리 문화..."그들처럼 되보고 싶다" 생각

▶실리콘밸리에서 기업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을 자주 만나셨죠.

“네. 실리콘밸리의 생태계를 서울시(이 영사는 원래 서울시 공무원이다)에 구현하고 싶었어요. ‘제도나 법이 다른 게 있겠거니’ 생각을 했죠, 사람들을 만나서 법이나 제도의 다른 점을 듣고 싶었어요.”

▶실리콘밸리와 한국이 제도 측면에서 많이 다르던가요.

“아니요. 제도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람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일하는 방식이 다르고 문제를 보는 관점이 다르고 푸는 방법이 다르더라고요. 나중엔 그런 것들을 보고자 주재원들, 스타트업 창업자들, 벤처캐피털 투자가들, 빅테크 엔지니어들을 많이 만났어요. 실리콘밸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 지 만나봐야 알 수 있잖아요. 과학기술 정책 관련 논문도 많이 읽었어요.”
실리콘밸리 주재원들과의 저녁 자리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신다면요.

“수평적 문화와 도와주는 문화가 좋더라고요. ‘이것 한 번 적용해봐’ 이렇게 제안도 하고 특정 기술에 대해 이론적으로 함께 공부하면서 깊이 있는 지식을 알게 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제가 자연스럽게 동경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벤치마킹해보고 싶다’였는데 나중엔 ‘그들처럼 되보고 싶다’고 생각을 많이했습니다.”

▶공직사회와 다른 점은요

“실리콘밸리는 본인이 열심히하면 그게 결과물로 나타나야하고, 그러면 합당한 인센티브를 받는 구조입니다. 또 비전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러면 스타트업을 차리죠. 그 가치와 비전을 갖고 고생해서 엄청난 성과도 내고요. 정리하면 본인이 일을 하다가 발견한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찾고 그래서 세계적인 기업을 키우기도 하고요, 합리적인 구조인 것 같습니다.”

서울시 핵심보직 거친 '에이스'...메르스 사태 겪으며 공직자 판단의 중요성 절감

▶공직은 언제부터 생각하셨어요

“원래 꿈은 예능이나 드라마 PD였습니다. 고등학생 때였어요. 동생이 투병 중이었는데 당시 안병영 교육부 장관님이 한 행사에서 아팠던 동생을 만나고 계속 챙겨주시는 모습을 보고 ‘안 장관님처럼 공직자가 돼 대한민국을 더 아름답게 기여할 수 있으면 보람된 일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죠. 그리고 안정적으로 집안을 챙기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고요. 그래서 정치외교, 행정학 전공을 할 수 있는 연세대 사회과학계열에 들어갔습니다. 제대 후 행시를 4년 준비했고 2005년 12월에 행시 49회. 일반행정 서울시 직렬 합격자 2명 중 차석으로 합격했습니다.(웃음)”

▶서울시에선 주로 어떤 업무를 하셨어요.

“기획조정실에서 커리어의 90%를 보냈습니다. 조직, 예산, 기획을 담당하는 컨트롤타워죠. 1번 팀장인 ‘기획조정팀장’도 2015년 1월부터 2016년말까지 약 2년 간 했었고요. 최장수 기획조정팀장이었습니다.”
지난해 10월 개천절 때 샌프란시스코 시청 행사 때 모습
▶기억에 남는 업무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메르스 사태 때 두 달 간 집에 못 갔어요. 메르스 대응 긴급 TF에 속했었는데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위기 때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것이었죠. 또 시민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고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경험이 지난해 7월 격리면제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어요. 다른 점이라면 메르스 때는 저를 좋게 봐주시는 분이 없었는데, 공관에선 선물도 주시고 평가가 좋았죠.(웃음)”

▶그런데 세월호 팔찌를 차고 계시네요

“2014년 4월16일을 잊지 못하죠. 공직자가 제대로 못 하면 국민들이 괴롭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였습니다. 당시 제가 복지팀장이었습니다. 세월호 때문에 희생된 서울시민이 계셨어요. 서울의 모 병원으로 시신이 갔고, 병원에서 ‘장례비용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공문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각 부처에 전화를 했는데 공문을 써줄 수 있는 부처가 안나왔어요. 결국 당시 한 부처에서 ‘책임진다’는 확답을 받고 서울시가 공문을 보내서 해결됐습니다. 시민의 시신을 못 챙기고 12시간 넘게 보낸 것에 대한 자괴감이 컸죠.”

공직자는 '관점'을 가져야..."나를 발전시키고 도전하는 삶 살 것"

▶다양한 경험 때문인지 이번 정부에서 청와대 근무도 하셨네요. 어떤 걸 경험하셨나요.

“공직자가 ‘관점’이 있어야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청와대엔 각 부처나 지자체에서 파견나온 공직자를 뜻하는 ‘늘공(늘 공무원)’과 정치권 등에서 청와대에 들어온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있습니다. 어공들이 늘공에 비해 행정업무는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자기만의 꿈과 비전이 있더라고요. 저 같은 늘공도 공직자로서 ‘관(觀)’이 없으면 직업관료(테크노크라시)로 전락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못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거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실리콘밸리 사람들처럼 나를 발전시키고 도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때 되면 승진하겠지’란 얄팍한 생각은 안 하려고요.”

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이상은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