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기축통화국?…"달러 못 구하면 금융위기 직결" [김익환의 외환·금융 워치]

사진=게티이미지뱅크
2020년 3월 19일. 금융시장은 역대급 패닉에 빠졌다. 원·달러 환율은 1285원70전까지 치솟은 데다 증시는 1400선까지 밀렸다. 코로나19가 덮치자 불안에 시달리는 전세계 투자자들이 모든 자산을 투매한 결과다. 외국인이 한국 금융시장을 떠나는 와중에 안전자산인 '달러'를 놓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단기 외화빚을 갚지 못한 증권사는 달러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부도설'이 돌기도 했다. 기축통화국이라면 겪지 못할 상황이다.

한국은 1997년 직후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위기 때마다 금융위기 목전까지 갔다. 달러를 비롯한 외화자금을 조달에 어려움을 겪은 결과다. 기축통화국이라면 자국 통화로 외화자금 빚을 갚는 것이 수월하다. 하지만 위기 때마다 값이 폭락하는 원화를 받겠다는 투자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21일 열린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한국이 곧 기축통화국이 될 것이란 보도도 있다"는 발언에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 후보는 이를 근거로 한국이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해도 무방하다는 논리를 폈다.

기축통화국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의는 없다. 1960년 미국 예일대 로버트 트리핀 교수가 처음 언급한 단어다. 한국은행은 기축통화를 '여러 국가의 암묵적 동의하에 국제거래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통화'로 정의했다. 전 세계 외환거래 및 외환보유액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로 인정받고 있다. 국제거래에서 비교적 자주 사용하는 유로화, 영국 파운드화, 일본 엔화, 스위스 프랑화 등은 흔히 교환성통화라고 평가한다.

한은은 기축통화를 충족하려면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분석했다. ▲국제무역결제에 사용되는 통화 ▲환율 평가 시의 지표가 되는 통화 ▲대외준비자산으로 보유되는 통화다. 하지만 원화는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올해 1월 국제결제통화 비중을 보면 달러가 39.92%로 독보적 1위다. 그 뒤를 유로(36.56%), 파운드(6.3%), 위안(3.2%), 엔(2.79%), 캐나다달러(1.6%), 호주달러(1.25%), 홍콩달러(1.13%) 등이 잇는다. 한국 원화의 비중은 20위권 밖으로 0.1% 수준에 불과하다.

외환상품시장에서도 한국 원화는 변방에 머무른다. 국제결제은행(BIS)이 매 3년 마다 발표하는 '전세계 외환상품조사 결과'를 보면 원화의 거래 비중은 2.0%다. 미국 달러화가 88.3%로 1위였고 유로화 32.3%, 엔화 16.8% 등의 순이었다.

외환보유액 지위에서도 원화는 소수 통화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작년 9월 말 전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59.2%, 유로 20.5%, 엔(5.8%), 파운드(4.8%) 캐나다달러(2.2%) 스위스프랑(0.2%), 기타(2.9%) 등이다. 한국 원화는 전세계 외환보유액 비중이 0.2% 미만으로 추정된다. 한은 관계자는 "전세계 외환시장 참가자들 가운데 원화를 기축통화국이라고 평가하는 곳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세계 곳곳에 흘러넘칠 만큼 유동성이 있어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기축통화국은 위기에 안정적으로 견뎌낼 만한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이 뒤받침돼야 한다"고도 말했다. 위기 때마다 외국인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남북이 대치 상황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한국의 기축통화국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재명 후보와 여권은 이 같은 기축통화국을 근거로 한국이 국채를 상당폭 더 찍고, 국가채무비율이 더 올라가도 문제 없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2021년 말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은 51.3%로 뜀박질하며 경고음이 커졌다. 하지만 여권에서는 선진국 35개국 평균(83.2%)을 밑돌고 상위 25번째인 만큼 더 빚을 내도 문제 없다는 주장을 폈다.

유혜미 한양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미국 달러화, 영국 파운드화, 일본 엔화, 유로화 등 국제 단위 결제나 금융거래에 통용되는 기축통화는 안전자산으로 간주되고 국제적인 수요도 뒷받침된다"며 "기축통화국은 국가부채를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할 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같은)비기축통화국의 경우 국가부채가 크게 증가하면 국가신용도가 하락하거나 환율이 상승하며 금융시장 불안이 초래될 수 있으므로 대체로 기축통화국에 비해 국가 부채비율이 낮다"고 강조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