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우대'로 먹고 살았는데…日 개미들이 우울한 이유 [이슬기의 주식오마카세]

주주에게 상품권 등 주는 주주우대제
일본선 주주우대 노리고 매수한 주주 많아
증시개편·기관 요구에 점점 사라져
대신 배당 늘리면 주가는 상승 화답
※이슬기의 주식오마카세에서는 매주 한 가지 일본증시 이슈나 종목을 엄선해 분석합니다. 이번주에는 일본증시 특유의 제도 '주주우대제도'에 대해 알아봅니다.
키리타니 히로토씨가 쓴 주주우대 팁 관련 책들. 사진의 인물이 키리타니 히로토씨다.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 자전거를 타고 어딘갈 급히 가고 있다. 도착한 곳은 한 식자재업체. "주주우대권 유효기간이 오늘까지라서요." 그는 우대권을 내고 주스를 받은 뒤 또 다시 서둘러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의 가방엔 다발로 묶은 주주우대권이 한가득이었다. 전 프로 장기기사 키리타니 히로토(73)씨는 주주우대로만 생활하는 기인으로 유명하다. 주주우대란 상장사가 소액주주들에게 답례차 자사 상품이나 할인권을 보내주는 일본의 증시 제도다. 그는 상장사가 보내주는 음식을 먹고, 상장사가 보내주는 상품권으로 옷을 사입고, 상장사가 보내주는 티켓으로 영화를 본다. 글로벌 금융위기 전 주식을 수억 엔어치 샀다 주가가 급락하자 피치 못해 선택한 삶이다. 그는 이익 볼 생각은 접은지 오래고 주주우대를 즐기며 살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의 모습을 보고 일본 열도에 주주우대를 주는 주식 매수 붐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키리타니씨가 이런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머지않아 끝날지 모른다. 일본 내 주주우대제도가 점점 모습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10년래 주주우대폐지 최다

지난 14일 재팬타바코(JT·종목번호 2914)는 주주우대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이제까지 JT는 보유 주식수에 따라 주주들에게 1년에 한 번 2500~1만3500엔 상당의 식료품(즉석밥, 우동세트 등)을 줬다. ABC마트(2670) 역시 지난달 주주우대제도를 없앴다. ABC마트는 주식 수에 따라 주주에게 3000~5000엔 상당의 구매상품권을 지급했다. 이 밖에 주주들에게 숙박권을 줬던 오오에도온천리츠(3472)나 타이어 구매상품권을 줬던 토요타이어(5105)도 주주우대제도를 없앤다고 밝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20년 9월~2021년 9월 간 일본서 주주우대제도를 폐지한 기업은 총 75개사에 이른다. 최근 10년간 가장 많은 수치다. 일본 기업들은 그동안 주주우대제도에 적극적이었다. 주주가 오래 주식을 보유하면 주가의 변동성을 줄일 수 있어 경영에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국내 코스피시장에 해당하는 도쿄1부증시에 잔류하기 위해선 개인주주수가 2200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규제도 주주우대제도 강화를 뒷받침했다. 일본은 한 번 주식을 사야할 때 100주씩 사야하기 때문에 개인주주수가 2200명을 못채우는 상장사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년 말 투자잡지엔 개인주주수가 2200명을 넘지 않는 종목의 목록이 게재됐고, 이 중 괜찮은 종목을 사면 투자이익에 더해 강화된 주주우대를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JT가 매년 주주들에게 줬던 주주우대혜택. 보유 주식 수에 따라 각각 A,B,C,D 세트가 배송된다.

○증시개편·공정한 주주환원 요구 영향

분위기가 바뀐 건 도쿄증권거래소가 재편되면서다. 도쿄증시는 현재 1부, 2부, 마더스, 자스닥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오는 4월 4일부터 프라임(글로벌 기업), 스탠다드(중견기업), 그로스(신흥기업) 등 3개 시장으로 재편된다. 그런데 1부시장에 상응하는 프라임시장 잔류조건 중 주주수에 대한 규제가 완화됐다. 기존엔 개인주주수가 2200명을 넘겨야 했지만, 앞으론 800명만 넘기면 된다. 비용을 들이며 주주우대를 해야 할 이유가 한가지 사라지는 셈이다.또 다른 이유는 공정한 주주환원을 요구하는 기관투자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주우대제도는 상품이나 교환권을 주기 때문에 외국인 투자자는 받을 수도 없고, 기관투자자는 받아 봐야 의미가 없다. 그래서 외국인과 기관도 공정하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주주우대제도가 아닌 자사주매입·배당으로 환원해 달라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됐다. 실제 JT와 ABC마트는 주주우대를 폐지하고 배당을 늘리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주주우대를 폐지한 기업들의 주가는 명암이 갈린다. 주주우대 폐지로 주가가 급락한 대표적 예는 스카이락홀딩스(3197)다. 패밀리레스토랑 '가스토' 등 여러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 회사는 2020년 9월 10일 주주우대 축소를 발표했는데 이튿날 주가가 10% 급락했다. 원랜 주식수에 따라 6000엔 혹은 3만3000엔의 교환권을 줬는데, 4000엔 혹은 1만6000엔으로 우대혜택이 크게 축소됐다. 기업의 성장성이 아니라 주주우대권을 목적으로 주식을 산 사람들이 그만큼 떠나간 것이다. 반면 주주우대를 폐지하고 배당 혹은 자사주매입을 늘리는 기업은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ABC마트는 주주우대폐지 후 배당을 늘리겠다고 발표하면서 이튿날 2.2% 상승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