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번지수' 잘못 짚은 네덜란드 연기금의 주주서한

韓 현실과 동떨어진 기후대응 주문
기업 압박 아닌 정책 변화 요구해야

강경민 산업부 기자
“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APG)이 진정한 책임투자자라면 청와대와 정부에 서한을 보냈어야 하는데….” APG로부터 서한을 받은 기업 관계자는 “국내에서 재생에너지 확대는 개별 기업이 노력한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며 한숨을 쉬었다.

유럽 최대 연기금 운용사인 APG는 지난 17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 10곳에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동종업계 글로벌 기업보다 탄소배출량이 높다는 일종의 경고장이었다. 그러면서 기업이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RE100에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탄소 감축에 나서지 않으면 보유 중인 지분을 매각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미국 유럽 등의 연기금이 잇따라 탄소중립 의지가 약한 기업에 대해 투자 철회를 시사하고 있다. 경제계 관계자들도 APG의 서한 발송이 탄소중립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문제는 APG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는 점이다. APG가 서한을 발송한 국내 기업 대부분은 국제 비영리기구인 CDP(탄소정보공개 프로젝트)가 인정한 기후변화 대응 우수기업이다. 서한을 받은 10곳 중 8곳은 지난해 CDP가 수여하는 ‘탄소경영 섹터 아너스’를 수상했다.

비교 잣대도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APG는 삼성전자가 경쟁사인 애플보다 탄소배출량이 높다고 지적했다. 과연 그럴까. 애플 본사는 설계·기획만 맡고 생산은 아시아 국가의 하청업체가 맡는다. 반면 삼성전자는 반도체 등 대부분 제품을 국내에서 직접 생산한다. 두 회사를 동종 업종으로 비교한 기준 자체가 틀렸다는 뜻이다. 삼성전자와 직접 비교가 가능한 미국 반도체업체 인텔은 삼성전자와 달리 매년 탄소 배출량이 늘고 있다는 건 또 다른 얘기다.

무엇보다 RE100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국내 전력시장에 대한 APG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방증이란 지적이다. 작년 11월 국내 전체 에너지원별 발전량 중 재생에너지 비중은 6.7%에 불과하다. 국내 기업들은 재생에너지를 쓰고 싶어도 대규모 생산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 유럽연합(EU)은 2019년 기준 15.3%에 달한다. 서유럽 국가로 한정하면 재생에너지 비율은 30%가 넘는다. 더욱이 한국 정부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발전조차 친환경에너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발전단가가 높은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사용을 무리하게 늘리면 기업의 수익성을 떨어뜨려 주주 가치 훼손으로 이어지게 된다. APG가 진정한 책임투자자라면 이 같은 시나리오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한국 정부에 탈원전 등 에너지 정책을 재고하라는 서한을 보내는 게 먼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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