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 인간의 고독한 삶 담았죠

(40)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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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K팝, K드라마, K뷰티의 열기가 뜨거워 어깨가 으쓱해진다. 하지만 노벨상 얘기가 나오면 갑자기 움츠러들게 된다. 각 나라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노벨과학상(물리·화학·생리의학상)과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우리나라가 아직 배출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일본은 이미 수십 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라는 두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보유하고 있다.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일본계 영국인인 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매년 후보에 오르고 있어 우리나라의 수상을 더 기다리게 된다.
한강 작가가 2016년 국제적 권위를 자랑하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을 수상하면서 우리나라 작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뜨거워졌다.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유능한 외국 작가가 속속 등장하고 있어 우리에게도 곧 좋은 소식이 들릴 듯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53년 전인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설국》 《천우학》 《산소리》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설국》이 가장 유명하다. 《설국》은 36세 때 쓴 단편 ‘저녁 풍경의 거울’의 소재를 살려 드문드문 발표한 연작을 모아 중편소설로 완성한 것이다.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내 소설의 대부분은 여행지에서 썼다. 풍경은 내게 창작을 위한 힌트를 줄 뿐만 아니라 통일된 기분을 선사해준다’고 했는데, 《설국》은 눈 내리는 니가타현의 온천장에 머물면서 집필했다.

풍경을 상상하고 명문장을 음미하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소설의 첫 부분을 외우는 독자들이 많을 정도로 《설국》의 서두는 일본 근대문학 전 작품을 통틀어 보기 드문 명문장으로 손꼽힌다.‘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 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고 명문장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소설이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한량처럼 사는 인물이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무용에 관한 글을 간간이 기고하는 정도다. 프랑스 무용론을 번역해 호화스러운 장정의 책을 자신의 돈으로 출간할 계획을 세운 시마무라는 ‘일본 무용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책’이라는 걸 안다. ‘자신이 하는 일로 스스로를 냉소하는 것은 어리광을 부리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그를 휘감는 것은 허무함이다.

《설국》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자, 마음이 뜨거운 고마코와 순수한 소녀 요코는 서로 묘하게 연결돼 있다. 병을 앓는 남자를 돕기 위해 게이샤가 된 고마코와 그 남자를 직접 간호한 데다 죽은 후 묘지까지 돌보는 요코는 비슷한 듯 다르다. 매사가 헛헛한 시마무라는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고마코를 보며 허무를 느끼고, 순수하나 당돌한 요코에게는 관심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감정을 느낀다.

겨울만 되면 《설국》을 읽는다

은하수가 쏟아지던 날 밤 마을에 불이 난다. 다친 요코를 안고 울부짖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에도 시마무라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휘청거린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 앞으로도 시마무라가 삶 속에 뛰어들지 못하고 의미없는 듯, 허무한 듯, 나른한 삶을 이어가며 허무에 휩싸일 거라고 예측하게 된다.

작품은 작가의 삶을 반영하기 마련인데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부모, 누나, 조부모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열여섯 살에 혼자가 되었다. 대학 때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작품에 작가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투영되면서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근미 작가
겨울만 되면 《설국》을 읽는다는 독자가 많은데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시마무라, 고마코, 요코의 각기 다른 삶이 잘 어우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문단의 일시적 유행에 휩쓸리는 법 없이 간결한 문체와 빈틈 없는 관찰력으로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깊숙이 파고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적 특성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겨울이 가기 전에 세 사람의 심리가 빛·색채·소리와 조화를 이루는 《설국》의 묘미를 느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