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인생의 주소, 문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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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인생의 주소
문무학젊을 적 식탁에는
꽃병이 놓이더니
늙은 날 식탁에는
약병만 줄을 선다
아! 인생
고작 꽃병과 약병
그 사이에 있던 것을[태헌의 한역]
人生住所(인생주소)
盛時食卓花甁設(성시식탁화병설)
老日食卓藥甁列(노일식탁약병렬)
嗚呼人生如何看(오호인생여하간)
只在花甁藥甁間(지재화병약병간)
[주석]
人生(인생) : 인생. / 住所(주소) : 주소.
盛時(성시) : 혈기가 왕성한 시기, 젊을 때. / 食卓(식탁) : 식탁. / 花甁(화병) : 꽃병. / 設(설) : 놓다, 놓이다.
老日(노일) : 늙은 날, 늙었을 때. / 藥甁(약병) : 약병. / 列(열) : 줄을 짓다, 줄지어 서다.
嗚呼(오호) : 아아! ‘嗚呼’는 감탄사이다. / 如何看(여하간) : ~을 어떻게 볼까? ~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여기서 이 ‘如何看’의 목적어는 앞에 나온 ‘人生’이다. 이 대목은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역자가 의문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只(지) : 다만, 오직, 그저. / 在(재) : ~에 있다. ‘在’의 의미상 주어는 윗 구절에 보이는 ‘人生’이다. / 花甁藥甁間(화병약병간) : 꽃병과 약병 사이.[한역의 직역]
인생의 주소
젊을 적 식탁에는 꽃병이 놓이더니
늙은 날 식탁에는 약병이 줄을 선다
아아! 인생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꽃병과 약병 사이에 있을 뿐인 것을
[한역 노트]
SNS상에서 위의 그림을 지인으로부터 받고 역자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은 “한시로 될 듯하네요.”였다. 언제부턴가 한글로 된 시나 글귀만 보면 한시로 번역이 가능할까를 가늠해보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네티즌이 가볍게 쓴 글로는 보이지 않아 조심스럽게 검색을 시도해본 결과, 놀랍게도 문무학 시인의 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역자의 본격적인 의문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무엇보다 이 그림을 만든 사람은 시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역자 생각에는 시구의 일부를 자의적으로 고친데다, 원시의 제목인 “인생의 주소” 대신에 “人生無常(인생무상)”이라는 한자어를 제목처럼 넣었기 때문에, 양심상 시인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대체 왜 시구의 일부와 시의 제목을 고쳤을까? 당연히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부분을 자기 마음대로 고치고는 원작자의 이름을 적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시인이 시구 하나, 시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겠는가! 그런 시를, 시인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그런 시를, 독자인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멋대로 고쳐버리고 원작자도 밝히지 않는 것은, 시와 시인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자 범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자는 오늘 작정하고 이 얘기를 하기 위하여, 만든 사람 추정이 상당히 어려워 보이는 위의 그림을 직접적으로 노출시키게 되었다. 만든 사람이 익명으로 SNS에 퍼뜨린 저 그림을, 역자가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한다면 역자는 여기에 응해줄 용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역자는 그 익명의 사람에게 고마운 부분도 있다. 인터넷에서는 종종 만나게 되는 일이지만, 그 익명의 사람이 본인이나 타인의 이름을 마치 시의 작자처럼 따로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만약 그 사람이 그랬더라면 역자는 이 작품이 문무학 시인의 시라는 것을 끝내 알지 못했거나, 알아도 아주 늦게야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타인이 지은 시나 글은 단 한 글자도 고쳐서는 안 된다. 타인의 소중한 차(車)에 낙서를 해서는 안 되듯이 말이다. 또한 작자를 숨김으로써 마치 자기의 시나 글인 것처럼 보이게 해서도 안 된다. 다만 작자를 밝히고 이렇게 고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 정도야 얼마든지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세상 그 어느 작자가 그것까지 말리겠는가!
이 시의 제목에서 시인에 의해 “주소”로 명명된 ‘꽃병과 약병 사이’는 우편물 등을 보낼 수 있는 공간적인 장소가 아니라, ‘인생’이 머무는 시간적인 장소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은 매우 철학적이다. ‘人生無常’처럼 단번에 와 닿지는 않아도 생각하면 할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제목인 것이다. 시인이 이 제목엔들 어찌 신경을 쓰지 않았겠는가!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익명의 사람이 마치 제목처럼 적은 ‘人生無常’은 너무 노골적인 만큼 깊이가 없어 보인다.
꽃병이 놓이기 이전의 시기인 어린 시절과 약병이 줄을 선 이후의 시기인 노년 시절을 제외한 것으로 보아, 시인이 얘기한 인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자기 의지적으로 살 수 있는 시기, 곧 빛나는 청춘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너무 어리거나 늙고 병들어서는 자기 의지적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듯하다.
시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청춘이 아닌 노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빛나는 청춘의 시기’를 반추하며 뿌듯해 하거나 회한에 잠겨야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종종 인생 2막으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는 병과 약을 친구로 삼아야 하는 때가 아닐까 싶다. 조지훈 시인이 <병에게>라는 시에서,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라고 병을 정의한 대목은, 절절한 체험과 깊은 성찰에서 길어졌을[汲] 것이다. 또,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한 미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Samuel Ulman)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병과 약을 친구로 삼아 가야하는 그 허허로운 시간의 길조차 청춘의 영토에 편입될 수 있지 않겠는가!
역자는 3연 7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4구의 칠언고시로 한역하면서 매구(每句)마다 압운하였지만, 전반 2구와 후반 2구의 운을 달리 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의 압운자는 ‘設(설)’·‘列(열)’, ‘看(간)’·‘間(간)’이 된다.
2022. 3. 1.<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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