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섬이 온다

한경 CMO Insight

광고에서 채굴한 행복 메시지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한국광고학회 제24대 회장)
김병희 서원대 교수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

일찍이 헝가리의 미학자 루카치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의 여행은 소설 읽기를 뜻한다.길이 시작되는 순간 여행(소설)의 결말이 보이지만, 자기 영혼을 확인하려고 그 길을 계속 간다는 것.

여기에서 여행을 소설 읽기가 아닌 일반적인 여행으로 바꾼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전남 신안군의 ‘퍼플섬(purple island)’에 갔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랏빛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고.퍼플섬 초입에서 바다에 걸터앉은 보랏빛 다리를 본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왔다. 보랏빛 다리를 걷지도 않았는데 바라만 봐도 행복감이 몰려왔으니, 여행을 마친 것이나 진배없었다.

퍼플섬은 반월도와 박지도를 일컫는 말이다. 신안군에서는 섬에 자생하는 보라색 도라지와 꿀풀의 생태적 특성을 고려해 주민들과 보랏빛 섬을 가꿔왔다.

2019년에 천사대교의 준공에 맞춰, 다리, 해안도로, 집의 지붕, 자동차, 길가의 파라솔, 건물 벽, 주민의 옷, 식기, 커피 잔까지 모두 보랏빛 일색으로 꾸몄다.보라색 경관에 어울리게 라벤더, 자목련, 수국, 보랏빛 순무도 심어 ‘보랏빛 천국’이란 명성도 얻었다. 반월도 카페 앞에는 보랏빛 반달 조형물에 어린왕자와 사막여우가 앉아있고, 박지도 매표소 앞에는 보라색 호랑이 모형도 설치했다.

보라색은 공교롭게도 세계적인 K-팝 스타인 방탄소년단(BTS)의 상징 컬러다. 그들이 퍼플섬에서 공연을 하거나 뮤직비디오를 찍는다면 환상적인 조합이 될 것 같다.

최근에는 파리 패션쇼에서 한국 패선을 알릴 소개 영상을 퍼플섬에서 촬영했다. 소개 영상에서는 바다와 섬을 배경삼아 퍼플교를 런웨이 무대로 활용했다. 남도의 작은 섬이 파리 패션쇼에서 알려지면 퍼플섬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다.문화체육관광부는 사계절 내내 보랏빛으로 가득 찬 퍼플섬을 꼭 가봐야 할 대표 관광지 100선에 선정하기도 했다.

퍼플섬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2020년에 독일의 위성방송인 프로지벤(Prosieben)과 홍콩의 유명 여행 잡지인 <유 매거진(U Magazine)>에 소개된 이후, 퍼플섬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유 매거진>에서는 퍼플섬을 한국의 ‘열폭여점(熱爆旅點, 뜨거운 여행지)’이라 소개하고, 6.2Km의 보랏빛길, 퍼플교, 라벤더 정원 등 곳곳을 폭넓게 안내했다(U Magazine 2020. 8. 28).

글로벌 언론사인 CNN은 ‘사진작가들의 꿈의 섬’이라 설명하며 사진 8장에 섬 구석구석을 담아 소개했다(CNN 2021. 2. 8).

폭스뉴스도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리기 좋은 보랏빛 천국이라 소개하며 반월도가 퍼플섬으로 바뀐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Fox News 2021. 2. 19).

필리핀의 텔레비전 채널인 ABS-CBN 뉴스에서는 생태 환경을 반영한 퍼플섬의 밝은 미래를 전망했다(ABS-CBN News 2021. 3. 16).

인도의 뉴스 채널인 WION에서는 퍼플섬의 매력을 소개하며 BTS의 상징인 퍼플과 퍼플섬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WION 2021. 3. 15).

아랍권 최대의 위성 방송사인 알자지라에서는 반월도와 박지도의 변신에 대해 ‘섬의 재 발명’이라고 평가했다(Al Jazeera 2021. 5. 25).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외신을 소개하며 퍼플섬의 관광 가치를 보도했다(연합뉴스 2021. 2. 23).
퍼플섬에 대한 국내외 주요 언론보도. 미국 CNN (2021. 2. 8), 미국 Fox News (2021. 2. 19), 필리핀 ABS-CBN News (2021. 3. 16), 인도 WION (2021. 3. 15), 아랍 Al Jazeera (2021. 5. 25), 연합뉴스 (2021. 2. 23), 홍콩 U Magazine (2020. 8. 28).
신안군의 홍보물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 편(2021)에서는 퍼플섬이 유엔으로부터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로 선정됐다는 사실을 알리며, 관광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강조했다.

2021년 12월 2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 총회에서는 퍼플섬을 ‘제1회 유엔세계최우수관광마을’로 선정했다.

유엔 전문기구로 1975년에 설립된 유엔세계관광기구는 관광 진흥 정책을 조정하는데, 한국을 비롯한 155개의 회원국과 6개의 준회원국 그리고 400여 지부로 구성돼 있다.

세계 75개국의 170개 마을과의 경쟁에서 퍼플섬이 3등급 중 가장 높은 1등급에 선정됐기에, 퍼플섬은 앞으로 아시아권의 새로운 관광 명물로 부상할 것이다.

퍼플섬은 컬러 마케팅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컬러 마케팅에서는 색상을 핵심 메시지로 설정해 마케팅 활동을 전개한다.

상품의 기능과 품질이 비슷해진 상황에서, 사람들은 상품의 효용이나 기능보다 상품 특유의 이미지나 감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컬러 마케팅에서는 브랜드의 이미지와 감성을 팔기 때문에 시각 이미지는 그만큼 중요하다. 지금까지 여러 도시에서 컬러 마케팅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를 장소 마케팅으로 연결해 제대로 실행한 곳은 퍼플섬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곳이 주목받는 장소로 성장하려면 방문가치(visitability), 주거가치(livability), 투자가치(investability)가 있어야 하고, 그 중에서 방문가치가 가장 중요한데 퍼플섬은 이미 방문가치를 확보했다.
신안군의 홍보물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 편 (2021)
마케팅 전문가 세스 고딘(Seth Godin)은 『보랏빛 소가 온다(Purple Cow)』(2003)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아주 좋은 정도 가지고는 안 되며 ‘주목할 만한(Remarkable)’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프랑스 농촌을 여행하던 어느 날, 저자는 차창 밖의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 뜯는 풍경이 좋아보였지만 그 장면이 계속되자 지루함을 느꼈다. 그때 누런 소나 하얀 소가 아닌 보랏빛 소가 나타난다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 같다는 영감이 떠올라 이 책을 썼다. 저자는 ‘리마커블’을 이야기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설명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누런 소, 얼룩 소, 검은 소가 있는 목장에 멀리서 보랏빛 소가 걸어온다면 돋보일 수밖에 없다. 까마귀 떼가 우글거리는 들판에 한 마리 백조가 있다면 우아한 자태가 더 빛날 것이다.보랏빛 소는 새롭게 시도하는 창의적인 발상을 뜻하기도 한다. 좋은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면 이야기가 곧 상품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이 끝났다고 느낄 정도로 행복감이 몰려오니, 퍼플섬은 분명 보랏빛 소와 같은 여행의 새로운 세계였다.

보랏빛 소가 오듯, 보랏빛 섬이 온다. 저만치에서 가슴 속으로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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