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중에도…'한국인' 천착한 우리시대 지성
입력
수정
지면A34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별세작가 이상(李箱)을 재발견한 인물, 1988년 서울올림픽의 구호 ‘벽을 넘어서’를 만든 사람,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원 창설을 주도하고 ‘갓길’이란 말을 만든 인물…. 국내 문화계에 이렇게 많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향년 89세…유언은 따로 없어
'우상의 파괴'로 문단 뒤흔들어
작가 이상 재발견한 평론도
국립국어원·한예종 창설 주도
88올림픽 구호 '벽을 넘어서'
'굴렁쇠 소년' 등 명장면 기획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가 지난 26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의 유족은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큰 통증 없이 돌아가셨다”며 “유언은 따로 남기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고인은 문학평론가, 소설가, 언론인, 문화기획자,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다. 생애 마지막에는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해왔다.1933년(호적상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국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5년 작가 이상의 문학을 분석하는 평론을 학보에 실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중견 문인이던 소설가 김동리, 시인 조향, 소설가 이무영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인은 생전 젊은 시절 ‘우상의 파괴’를 써서 기성 문단을 뒤흔든 사람이 아니라 ‘이상론’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작가 이상을 되살려낸 인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1960년에는 27세의 나이로 서울신문 논설위원에 발탁됐고 이후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를 거쳤다. 1967년 34세의 나이로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돼 30년 넘게 강단에 섰다. 1973년 잡지 ‘문학사상’과 출판사 문학사상사를 설립했고 1977년에는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이상 문학상’을 제정했다.
그는 60여 년 동안 수많은 책을 써낸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가장 유명한 책은 1982년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한국인이 쓴 책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하이쿠와 분재, 트랜지스터 등 일본의 축소지향적 요소가 일본의 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침략 등 확대지향 시도는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해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6년엔 《디지로그》를 통해 디지털 기술의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들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통찰을 전했다.고인은 문화기획자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괄 기획을 맡아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명장면을 만들었다. 고인은 딱딱한 표어 대신 ‘벽을 넘어서’라는 구호를 만들고, 개회식 최고 명장면으로 꼽히는 ‘굴렁쇠 소년’을 연출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 문화공보부를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하면서 1990년 1월 출범한 문화부 초대 장관을 맡아 이듬해 12월까지 재임하며 문화정책의 기틀도 마련했다. 문화예술인으로는 처음으로 문화부를 이끈 고인은 2년간의 짧은 재임 기간에도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전통공방촌 건립, 도서관 업무 이관 등 공약했던 ‘4대 기둥 사업’을 모두 마무리하고 물러났다. 그는 장관으로서 가장 잘한 일은 ‘노견(路肩)’이란 행정 용어를 ‘갓길’로 바꾼 것이라고 자평하길 좋아했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책은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탐구하는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다. 12권으로 계획한 시리즈 중 2020년 2월 첫 권인 《너 어디에서 왔니》를 출간했다.고인은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교수가 있다. 고인의 장녀 이민아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지역 검사를 지냈다가 2012년 위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은 다음달 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