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읊는 리어왕, 판소리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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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리어' 17~27일 초연“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일러니, 만물을 이로이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저어하난 낮은 곳에 처하노라.” 젊은 리어왕이 이렇게 노래한다. 국립창극단이 오는 17~2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초연하는 창극 ‘리어’의 한 장면인데, 노자의 ‘도덕경’ 8장의 첫 구절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녹여냈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노자 사상 엮어
국립창극단은 인간의 탐욕과 파멸을 드러내는 리어왕과 노자가 주창한 ‘물의 철학’을 엮어 2막 20장의 창극으로 각색했다. 리어왕이 겪는 비극에 글로스터 백작과 두 아들의 관계를 대조시켜 인간의 어리석음을 극적으로 풀어낸다. 리어왕은 두 딸의 아첨에 홀려 총애하던 막내딸 코딜리어를 버리고 끝내 파멸한다. 글로스터는 차남의 음모로 반역자로 몰리고 두 눈을 잃고서야 장남에 대한 오해를 풀고 진실을 깨친다.고전 희곡의 줄거리에 노자 사상을 엮은 이는 극작가 배삼식(사진)이다. 국립창극단과 함께 ‘트로이의 여인들(2016년)’ ‘귀토(2021년)’ 등에서 협업한 배 작가는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잔혹한 리어왕을 읽다가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며 “모든 존재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데, 소멸을 앞둔 존재를 가엽게 생각하길 바라며 극본을 썼다”고 말했다.
리어왕 역은 젊은 소리꾼 김준수(31)가 맡았고, 글로스터 역에는 소리꾼 유태평양(30)이 발탁됐다. 원작에선 노인인 캐릭터를 30대 소리꾼들이 연기하게 된 것. 김준수는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여주인공 헬레네 역으로 호평받았다. 연출을 맡은 정영두는 “각자 소리의 결과 작품 속 캐릭터 이미지 등을 보고 (캐스팅)했으나 100% 확신하지는 못하다가 총연습을 보면서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음악과 무대 연출에도 관심이 쏠린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영화 ‘기생충’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정재일이 창극 ‘귀토’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을 작창한 소리꾼 한승석과 공동 음악감독을 맡았다. 이태섭 무대디자이너가 ‘물의 철학’이라는 노자 사상을 무대 위에 펼친다. 폭 14m, 깊이 9.6m의 수조에 물 20t을 채우고, 소리꾼과 배우들은 물을 밟고 연기한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