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탈원전의 말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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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 안 바뀐 "원전이 주력 전원" 발언날짜까지 기억이 난다. 2017년 6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원전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하고 탈핵 시대로 가겠다”며 탈원전 정책을 선포했다. 이때 탈원전 정책이란 “핵발전소를 긴 세월에 걸쳐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이라고 정의를 밝히고 신규 원전건설 백지화, 원전 계속운전 금지,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라는 구체적인 내용도 제시했다.
탈원전 폐기·합리적 에너지정책 수립을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이후 조직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약 3개월의 활동과 시민참여단 조사 결과에 따라 일시 중단했던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재개를 정부에 권고하면서, 원전 발전 비중 축소 정책까지 권고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리고 4일 뒤인 2017년 10월 24일, 정부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후속 조치 및 에너지 전환(탈원전) 로드맵’을 발표하며 ‘에너지 전환’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등장시키고, 이를 구성하는 두 개 축을 원전의 단계적 감축과 재생에너지 확대로 제시했다. 물론 원전의 단계적 감축안에는 앞서 탈원전 정책의 정의가 고스란히 담겼다.이후 탈원전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이를 의식한 탓인지 정부는 국회 대정부질의 답변 과정에서 “탈원전은 부적절한 용어이며 60년에 걸쳐 원전 의존도를 줄여가자는 것”이라며 다시 바뀔 것 없는 탈원전의 정의를 되뇌었다. 실질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국내 원자력 산업 및 연구 사업 특성상 원자력계조차 정부 인사가 참여하는 자리에서는 탈원전을 탈원전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에너지 전환으로 표현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5년간 탈원전 정책은 공론화위원회 권고를 받아들인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와 경제성 조작 파문으로 재판 중인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건을 제외하면 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 원전 계속운전 금지 등 변한 것이 전혀 없다. 2017년 12월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 2019년 6월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 2020년 12월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 2021년 10월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안’ 및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상향안’, 그리고 2021년 12월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 지침서’에까지 탈원전 정책은 일관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이제 정부는 임기가 두 달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원자력이 향후 60여 년간 주력 기저 전원”이라는 수상한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2017년 당시 발표한 탈원전 정책의 정의를 재차 반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면 ‘탈원전’이니 ‘에너지 전환’이니 그 이름은 형식에 불과하다. 탈원전 정책의 본질은 원전 산업을 사용 기한이 정해진 사양 산업으로 규정한 데 있다. 이 오만한 시한부 선고가 60여 년간 힘들여 일궈 온 원자력 산업계와 교육계의 근간을 흔든 것이다.
특히, 국가 안보적 특성을 갖는 에너지 산업은 미래 기술 발전 상황에 따라 시장이 점진적으로 결정·조정해 가도록 조심스럽게 운영해야 한다. 다음 정부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국내 원전 산업을 시한부로 규정하는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합리적인 에너지 정책이 수립·시행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