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허리 가늘어진 건…봄 와도 봄 같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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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군원(昭君怨)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저절로 옷 허리띠 느슨해진 건
몸매를 가꾸기 위함이 아니라네.
* 동방규(東方虬) :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소군원(昭君怨)’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虬)가 쓴 시입니다. 그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고, 측천무후 때 좌사(左史·사관)를 지낸 사실만 전해옵니다. 그러나 이 시 덕분에 후세에 길이 남는 시인이 됐지요.
시의 주인공은 기원전 30년 무렵 한(漢) 원제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입니다. 양갓집 딸로 꽃다운 나이에 궁녀가 된 그녀는 절세미인이었죠. 훗날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왕소군은 그러지 않았죠. 결과는 뻔했습니다. 그녀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못했죠. 얼굴에는 보기 싫은 점까지 찍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북방 흉노족장이 한나라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청했습니다. 화친이 필요한 원제는 승낙했죠. 그때 낙점된 궁녀가 왕소군입니다. 그런데 작별 인사하러 온 왕소군을 본 원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과 달리 천하절색이었기 때문이죠.
‘초상화 비리’를 알게 된 원제는 그 자리에서 화가의 목을 날려버렸지만 흉노족장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습니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 문학에 수많은 소재로 쓰였습니다. 동방규의 시도 그중 하나죠. 이 시에 나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왔건만 봄 같지가 않다)’이라는 구절이 특히 유명합니다.
낯선 이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그녀의 외로움이 오죽했을까요. 황량한 땅이어서 꽃과 풀도 나지 않으니 봄은 왔으되 진정 봄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첫 두 구절의 의미를 뒤집어 새겨보면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지요. 아무리 오랑캐 땅이라 해도 어찌 봄꽃과 풀이 없겠습니까. 다만 그녀의 마음이 삭막했을 것입니다. 시름으로 몸이 야위어 옷 띠가 절로 느슨해질 정도였으니 더욱 그랬을 테지요.
그런 점에서는 ‘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마는/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라고 해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소군이 백옥 안장 떨치고
말에 오르자 붉은 뺨에 눈물 흐르네.
오늘은 한나라 궁녀의 몸
내일 아침 오랑캐 땅 첩 신세로다.
이 시는 두 수로 구성돼 있는데 위의 시는 둘째 수입니다. 첫째 수에서 이백은 ‘살아선 황금 없어 초상화 잘못 그리게 하더니/ 죽어선 청총을 남겨 사람 탄식하게 하네(生乏黃金枉畵工 死遺靑塚使人嗟)’라며 안타까워했지요. 흉노 땅에 묻힌 왕소군 무덤의 풀이 겨울에도 시들지 않아 청총(靑塚)이라 했다는 얘기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당나라 시인들이 한나라 때의 왕소군을 그린 것은 그때도 주변 이민족과의 화친을 위해 공주를 시집보내는 일이 허다해 그것을 풍자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요.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은’ 3월 아침입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저절로 옷 허리띠 느슨해진 건
몸매를 가꾸기 위함이 아니라네.
* 동방규(東方虬) :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소군원(昭君怨)’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虬)가 쓴 시입니다. 그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고, 측천무후 때 좌사(左史·사관)를 지낸 사실만 전해옵니다. 그러나 이 시 덕분에 후세에 길이 남는 시인이 됐지요.
시의 주인공은 기원전 30년 무렵 한(漢) 원제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입니다. 양갓집 딸로 꽃다운 나이에 궁녀가 된 그녀는 절세미인이었죠. 훗날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불렸습니다.
절세미인을 추녀로 그린 화가 때문에
원제는 이미 3000여 명의 여인을 거느리고 있었죠. 그래서 궁중화가에게 새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그걸 보고 간택했습니다. 궁녀들이 궁중화가에게 뇌물을 주며 잘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뇌물 액수에 따라 미색이 달라졌다고 합니다.그러나 왕소군은 그러지 않았죠. 결과는 뻔했습니다. 그녀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못했죠. 얼굴에는 보기 싫은 점까지 찍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북방 흉노족장이 한나라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청했습니다. 화친이 필요한 원제는 승낙했죠. 그때 낙점된 궁녀가 왕소군입니다. 그런데 작별 인사하러 온 왕소군을 본 원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과 달리 천하절색이었기 때문이죠.
‘초상화 비리’를 알게 된 원제는 그 자리에서 화가의 목을 날려버렸지만 흉노족장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습니다.
‘낙안(落雁)’과 ‘춘래불사춘’의 어원
오랑캐 땅으로 향하는 왕소군의 심정은 찢어지는 듯했죠. 아린 마음을 달래려 금(琴)을 연주했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처량했습니다. 날아가던 기러기 떼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질 정도였다고 하지요.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생겼습니다.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 문학에 수많은 소재로 쓰였습니다. 동방규의 시도 그중 하나죠. 이 시에 나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왔건만 봄 같지가 않다)’이라는 구절이 특히 유명합니다.
낯선 이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그녀의 외로움이 오죽했을까요. 황량한 땅이어서 꽃과 풀도 나지 않으니 봄은 왔으되 진정 봄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첫 두 구절의 의미를 뒤집어 새겨보면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지요. 아무리 오랑캐 땅이라 해도 어찌 봄꽃과 풀이 없겠습니까. 다만 그녀의 마음이 삭막했을 것입니다. 시름으로 몸이 야위어 옷 띠가 절로 느슨해질 정도였으니 더욱 그랬을 테지요.
그런 점에서는 ‘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마는/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라고 해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궁녀, 내일은 오랑캐 첩
동방규에 이어 이백도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시를 남겼습니다.왕소군이 백옥 안장 떨치고
말에 오르자 붉은 뺨에 눈물 흐르네.
오늘은 한나라 궁녀의 몸
내일 아침 오랑캐 땅 첩 신세로다.
이 시는 두 수로 구성돼 있는데 위의 시는 둘째 수입니다. 첫째 수에서 이백은 ‘살아선 황금 없어 초상화 잘못 그리게 하더니/ 죽어선 청총을 남겨 사람 탄식하게 하네(生乏黃金枉畵工 死遺靑塚使人嗟)’라며 안타까워했지요. 흉노 땅에 묻힌 왕소군 무덤의 풀이 겨울에도 시들지 않아 청총(靑塚)이라 했다는 얘기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당나라 시인들이 한나라 때의 왕소군을 그린 것은 그때도 주변 이민족과의 화친을 위해 공주를 시집보내는 일이 허다해 그것을 풍자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요.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은’ 3월 아침입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