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韓정부 뒤늦은 러시아 제재의 후유증

기업들 수출 가능 여부에 혼란
수출통제권 美정부에 내줄수도

강진규 경제부 기자
러시아에서 사업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은 요즘 시시각각 변하는 대(對)러시아 금융·수출 제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러시아에 가하고 있는 제재가 우리 기업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러시아 관련 상담센터에 3일까지 접수된 국내 기업들의 애로사항 및 문의 건수는 400건을 넘어섰다. 특히 산업통상자원부가 운영하는 러시아데스크에는 러시아에 생산품을 수출할 수 있는지 등을 묻는 문의가 150건 가까이 들어왔다. 수출 가능 여부 등이 확실치 않아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기업이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우리 기업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정부가 뒤늦게 제재에 동참한 탓이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러시아를 배제하는 조치는 국제사회보다 이틀 늦었다. 이보다 더 큰 사안은 수출 규제다. 한국의 전자, 컴퓨터, 보안, 센서 등 기술 제품에 대한 러시아 수출 제한 조치는 나흘 늦었다. 강대국 질서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논리에 따라 머뭇거린 결과다.

이 때문에 한국은 미국의 해외직접제품규제(FDPR) 면제국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FDPR은 미국 밖의 외국 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도 미국이 통제 대상으로 정한 기술이 사용될 경우 수출을 금지할 수 있도록 정한 조항이다. 한국은 면제국에 포함되지 않아 7개 분야 57개 제품을 러시아에 수출할 때 미국 정부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마자 러시아 제재에 나선 유럽연합(EU)과 일본,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32개국은 미국의 FDPR 규제가 면제됐다.

물론 FDPR 규제 면제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면제국이든 아니든 기술 제품을 러시아에 수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통제권을 해당국 정부가 갖고 있느냐, 미국 정부가 갖고 있느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 정부가 수출 허가권을 갖고 있으면 우리 기업들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진다. 산업부가 미국 정부에 문의했더니 휴대폰, 자동차, 세탁기 등 소비재는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한 게 대표적 사례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시간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FDPR 규제를 지난달 24일 발표하면서 3월 26일 이전 선적분까지는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일종의 유예기간이다. 한국 정부는 유예기간 내 FDPR 면제국 지위를 얻기 위해 미국 정부와 협의하겠다고 했다. 멕시코 출장 중이던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도 이를 위해 급히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처음부터 국제사회와 함께했으면 이런 부산을 피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