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도발로 짙어진 세계경제 '퍼펙트 스톰' 먹구름…한국도 불안

국제 공급망 타격에 물가 뛰고 성장 '발목'…침공 장기화 우려
미·유럽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고개'…"우리나라도 영향 경계"

5일로 열흘째를 맞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지구촌 경제도 뒤흔들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유발한 국제 공급망 교란이 러시아의 도발로 악화하면서 생계와 직결된 기름과 가스, 곡물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더 뛰고 있다.

미국의 긴축 정책과 중국의 급격한 경기 둔화로 세계 경제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동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은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우려를 키운다.

퍼펙트 스톰은 여러 악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경제가 큰 위기에 빠지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물가는 치솟고, 경기는 뒷걸음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걱정이 다시 커지고 있다.

물가와 환율, 금리가 모두 뛰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 성장·물가 동반 충격…고개 드는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안 그래도 고공행진을 하는 국제 원자재 가격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면서 각국의 시름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서비스 오피넷에 따르면 작년 말 배럴당 70달러대였던 두바이유와 브렌트유,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지난 2일 모두 100달러를 넘은 후 110달러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밀 선물 가격은 14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뛰었고, 유럽 시장의 천연가스 가격을 대표하는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지난 2일 장중 최고가를 기록하는 등 폭등하고 있다.

러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국내총생산·GDP 기준)은 1.7%로 상대적으로 작다고 볼 수 있지만 세계 3위 산유국인데다가 우크라이나와 함께 세계 밀 수출의 29%를 차지한다. 니켈과 알루미늄 등 다른 원자재의 주요 공급국이기도 하다.

유럽은 천연가스의 40%가량을 러시아에 의존한다.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는 아직 서방의 제재 대상에 올라있지 않지만 유럽을 비롯한 세계적인 수급 우려는 커지고 있다.

영국 싱크탱크인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는 지난 2일 보고서에서 이런 상황이 내년까지 세계 경제 성장률을 1%포인트 낮추고 물가는 올해 3%포인트, 내년 2%포인트 끌어올릴 것으로 추정했다.

이미 각국의 물가가 뛰고 있는데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더 커진 것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년 전 대비 5.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지난 1월 소비자물가는 7.5% 올라 40년 만에 최대 상승 폭을 보였다.

세계 금융 중심지인 미국 월가에서는 치솟는 유가와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매파 성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재현될 수 있다는 공포가 살아나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이 3일 전했다.

유럽중앙은행(ECB)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책위원회의 마리오 센테노 위원은 유럽의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경고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3일(현지시간) 상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에너지 가격 중심의 물가 상승과 소비·투자 위축이 미국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전날 파월 의장은 이달 연방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최대 0.5%포인트 올릴 것이라는 월가의 관측에 비춰볼 때 완만한 인상을 선택하는 셈이다.

치솟는 물가를 잡으려면 기준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야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몰고 올 경기 하강 위험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각국 중앙은행의 고민이다.
◇ 한국 내수·수출 불안에 물가는 더 불안…불확실성 가중
우리나라 역시 우크라이나 사태의 영향권에 들어있다.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교역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외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상 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무역수지가 두 달 연속 적자(작년 12월 -4억3천만달러, 올해 1월 -48억3천만달러)에 2월 흑자(8억4천만달러)로 돌아섰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불안한 상황이다.

당장 우크라이나 사태의 큰 여파는 물가다.

2월 소비자물가는 작년 같은 달보다 3.7% 올라 5개월 연속 3%대 행진을 했다.

유가와 외식비가 물가를 끌어올렸다.

동유럽에 발생한 이번 전쟁이 장기화하거나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 제재 수위가 높아질 경우 원자재 가격이 더 뛰고 국제 공급망 차질이 심화하면서 인플레이션을 더욱 자극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미 씨티그룹은 국제 에너지 가격이 10% 상승하면 올해 한국 GDP는 0.17%포인트 감소하고, 소비자물가는 0.24%포인트 상승해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특수가스와 팔라듐(반도체 촉매·도금 재료)의 경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의존도가 높아 반도체 생산이 차질을 빚으면 한국 경제의 하방 위험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1월 산업생산(-0.3%)과 소비(-1.9%)가 20개월 만에 동반 감소해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대외 불확실성이 한층 커진 것이다.

앞서 한국은행은 지난달 24일 내놓은 수정 경제전망에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로 3.1%로 대폭 높여 잡았다.

그러나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3.0%를 유지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위기는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경계해야 한다"며 "올해 경제 성장률이 정상 경로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성장세가 예상보다 약해지고 물가는 더 높아지면 스태그플레이션이 올 수 있는 만큼 산업·재정 정책을 재정비해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