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의 '신세계', 증명의 시간이 다가온다[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사진=신세계그룹 제공]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재계에서 유명한 ‘취미 부자’다. 웬만한 디지털 신형 기기는 가장 먼저 써봐야 직성이 풀린다. 야구에 대해선 구단주가 꿈이었을 정도로 애정이 깊다. 코로나19 시기엔 ‘골프 홀릭’을 자처했다. 그의 또 다른 취미로는 로봇 모형 수집을 꼽을 수 있다. 한정판 ‘마징가Z’ 같은 ‘어른이’용 고가의 장난감들이 그의 수집 대상이라고 한다. 요리도 그가 즐기는 취미 생활 중 하나다. 자신은 하루에 한 끼밖에 안 먹을 정도로 관리에 철저하지만, 남들에게 요리 해주는 걸 ‘인생의 낙’이라고 할 만큼 좋아한다. ‘멸공’ 논란을 일으켰던 인스타그램 활동 역시 정 부회장이 다른 재계 수장들과 달리 열정을 갖고 임하는 취미 활동이다.

다방면에 대한 관심은 뛰어난 상상력의 소산이다. 연결과 결합이 화두인 AI·빅데이터 경영 시대에 CEO의 상상력은 기업의 훌륭한 자산이다. 실제 정 부회장은 모친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으로부터 독립, 이마트 부문을 총괄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감행했다. 초기엔 주로 글로벌 유통업체들을 벤치마킹하는 방식이었다. 어려서부터 미국, 일본, 유럽 등 해외 곳곳을 다녀 본 경험을 살려 평소 눈여겨봤던 성공 모델을 이마트에 접목하려 했다. 만물상 유통점인 일본의 돈키호테를 본뜬 삐에로쑈핑을 비롯해 무인양품과 비슷한 자주, 영국의 대형 쇼핑몰인 웨스트필드를 본뜬 스타필드, 캐나다 PB인 노네임에서 컨셉트를 가져온 노브랜드 등이 대표적이다. 일렉트로마트는 일본에서 위력을 떨쳤던 가전 양판점이 벤치마킹 대상이다.

만화경(萬華鏡)으로 세상을 보는 정용진

구학서, 허인철 부회장 등 탁월한 전문 경영인과 함께 이마트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이명희 회장은 두 가지 움직이지 않는 철칙을 갖고 있었다. 재무적 안정을 모든 경영활동의 최우선 순위에 놓을 것, 억울한 규제라고 하더라도 정부와 사회 여론의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지 않도록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신세계그룹이 재계 20위 안에 드는 대기업집단임에도 대관팀을 별도로 운영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이마트는 시쳇말로 ‘상식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남들이 생각지 않았던 파격을 시도하기보다는 유통기업으로서 내생적 성장에 주력했다. 이렇다 할 M&A(인수·합병)도 없었다. 전국에 이마트 매장을 마치 목 좋은 땅을 고르듯이 차곡차곡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정 부회장이 해외 유통업체들을 벤치마킹했던 것도 이명희 회장이 세워 놓은 원칙의 범위 안에서 시행됐다. 시행착오를 해도 괜찮은 수준의 투자였다는 얘기다. 실제로 삐에로쑈핑 등 몇 개의 신규 사업은 시장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사실상 폐업됐다. 이마트와 쓱닷컴을 총괄하고 있는 강희석 대표가 정 부회장의 삼고초려 끝에 신세계그룹에 입사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정 부회장이 벌여놓은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신세계 전현직 임원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이명희 회장도 정 부회장의 자유분방한 성향을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 회장은 정 부회장이 신세계그룹이 오랫동안 만들어 놓은 상식의 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이쯤에서 가정 하나를 해보자. 만일 신세계이마트가 예전의 ‘상식 경영’에 집착한 채로 쿠팡, 네이버 등 신흥 경쟁자들과의 전장에 나갔다면 백전백패였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 신세계 경영자들의 능력을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도 시대의 필요에 따라 변하는 법이라는 얘기다.

이마트가 보여 준 파격의 연속

상상을 뛰어넘는 정 부회장의 파격은 온·오프라인 경계가 허물어진 유통 전쟁에 딱 들어맞았다. 그가 수년 전부터 에브리데이 로우 프라이스(everyday low price)의 e마트가 아니라 e커머스 시대의 e마트여야 한다고 부르짖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정 부회장은 롯데쇼핑 등 경쟁사보다는 서둘러 ‘커머스 전쟁’에 출전했다.

정 부회장은 유통업체 해외 진출의 공식처럼 통하던 중국, 동남아 시장 공략을 과감히 접고, 미국이라는 선진국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M&A 등을 통해 이마트가 미국 자회사인 굿푸드홀딩을 통해 보유한 ‘간판’만 5개에 달한다. 브리스톨 팜스, 레이지 에이커스, 메트로폴리탄 마켓, 뉴 시즌스 마켓, 뉴 리프 커뮤니티 마켓 등으로 전체 매장이 26일 기준으로 총 51개다. 이들 미국 매장에서 지난해 1조6929억원의 매출에 269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로 꼽히는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를 끌어들여 쓱닷컴을 만든 것도 대기업으로선 파격적인 시도다. 오너가 이끄는 대기업들은 사모펀드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경향이 많다. 삼성, 현대차, LG 등이 CVC를 만들어 스타트업에 투자하기는 해도 계열사를 사모펀드와 공동 경영하는 일은 없다. 재계 상위 기업 중에선 SK그룹이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최태원 SK 회장은 국내 대형 사모펀드의 전문가들을 ‘SK대학’에 초빙해 그들의 경험과 식견을 경청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숱한 공동 투자를 진행 중이다. 재계 5위인 롯데도 사모펀드와 손을 잡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 기업 중 대부분이 사모펀드나 VC(벤처캐피탈) 등 외부로부터 투자받아 성장했다”며 “이는 단순히 재무적인 측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개방성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설명했다.지난해 6월 이베이코리아를 3조4404억원에 인수한 건 정 부회장이 던진 건곤일척의 승부수다. 신세계는 창사 이래 최대 M&A를 통해 유통 플랫폼으로 도약할 수 있는 진입 문턱을 넘었다. 국내 유통 플랫폼 중 쿠팡, 네이버와 경쟁할 수 있는 곳은 신세계가 유일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네이버와 지분교환으로 동맹을 맺는 등 ‘적과의 동침’을 만든 것도 정 부회장만이 할 수 있는 시도다. 이마트의 본사인 성수동 건물을 매각하는 등 부동산 활용법에서도 정 부회장은 남다른 솜씨를 발휘했다.

올해 "증명의 시간"이 찾아올 것

정 부회장이 그리는 ‘신세계’에 한계가 없다는 건 지금껏 장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동전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다. 넓은 상상력은 달리 말해 전선이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시쳇말로 벌여 놓은 일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정 부회장은 지난해 프로야구단의 구단주가 됐고, 올해 미국 캘리포니아의 유명 와이너리를 인수했다. 최근엔 노브랜드로 햄버거에 이어 피자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골목상권 침해라는 논란에 휘말렸다. 대기업이 나선다고 금세 시장을 평정할 것이라는 예견은 비약에 불과하지만, 논리의 합리성 여부를 떠나 요즘 이마트는 예전엔 없던 ‘대관 이슈’로 분주하다. 스타벅스만 해도 이마트가 100% 지분을 보유하게 되면서 잠재 뇌관이 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엔 ‘이부진(호텔신라 대표)의 아티제’를 허용치 않던 정서가 남아 있다.

재무적으로도 이마트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지난해 이마트의 연결 기준 부채총액은 18조8418억원으로 전년(11조8438억원) 대비 59% 증가했다. 부채비율은 151%로 위험 수준인 200%에 미치지는 않지만, 106%였던 2019년에 비하면 꽤 올라온 셈이다. 타인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다는 얘기인데 더 큰 문제는 이마트의 현금 창출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15조538원의 매출을 올린 이마트의 영업이익은 2659억원으로 전년(2949억원)에 비해 소폭 감소했다.미국 법인에서 흑자를 내면서 연결 기준으로는 2371억원(2020년)에서 지난해 3167억원으로 영업이익이 증가했지만, 캐쉬카우인 이마트의 영업이익이 줄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경쟁사인 쿠팡은 지난해 22조원에 달하는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하며 이마트를 처음으로 제쳤다. 온라인 쇼핑 시장의 전체 파이가 커지고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쿠팡, 네이버 등 신흥 경쟁자들이 이마트 등 대형마트의 몫을 뺏어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올해 ‘정용진의 신세계’는 증명의 시간을 맞을 것이다. G마켓글로벌(옛 이베이코리아)과의 PMI(인수 후 통합) 결과물을 시장에 보여줘야 하고, 더 나가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사라진 이마트만의 쇼핑 경쟁력을 입증해야 한다. 이마트, 쓱닷컴, G마켓 등이 공동으로 ‘바잉 파워’를 행사할 수 있다는 식의 산술적인 합으로는 시장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네이버와의 제휴에 대해서도 여전히 무엇을 위한 것이었냐는 의문이 많다. 이마트몰을 네이버에 입점시킨 것 외에 이마트가 가져온 성과물은 거의 없다.

정 부회장은 지난해 초 신년사에서 “고객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라며 “지금은 망원경이 아니라 만화경으로 미래를 봐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마트는 만화경을 통해 전선을 넓히는 데는 분명 성공했다. 이제 각 전선의 전투를 어떻게 승리로 이끌어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