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시장 진퇴양난" 바짝 엎드린 삼성·현대차

美 기업처럼 철수하자니…
"다시는 발 못 붙일 것" 곤혹

계속 버티며 사업하자니…
글로벌 불매운동 낙인 찍힐라
“러시아에서 철수하자니 다시는 발을 못 붙일 것 같고, 그대로 있자니 ‘전쟁을 일으킨 나라에서 계속 돈 벌겠다는 기업’으로 낙인찍힐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8일 러시아에서 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미국 애플, 제너럴모터스(GM)처럼 러시아 사업을 바로 접을 수도 없고, 지속하는 것도 쉽지 않아 바싹 엎드려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러시아가 전날 한국을 비(非)우호국가로 지정한 가운데 우리나라가 대(對)러시아 수출 통제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이날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러시아 시장 내 제품 판매와 서비스 중단을 요청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하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 겸 디지털혁신부 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의 탱크와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유치원과 병원을 폭격하는 상황에서 삼성의 멋진 제품이 러시아에서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페트로프 부총리는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각종 제품 판매와 서비스를 일시 중단해달라는 내용의 서한까지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러시아 시장 매출 규모는 연간 약 4조4000억원으로 다른 시장에 비해 크지 않다. 하지만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모스크바 인근 칼루가 공장이 인근 독립국가연합(CIS)에 대한 가전제품 공급을 책임지고 있어 철수하면 오랜 기간 공들여 개척한 시장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삼성전자가 러시아에서 섣불리 철수할 경우 재진출은 사실상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폭스바겐, 도요타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 10여 곳이 ‘러시아 손절’에 나서면서 현대자동차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현대차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연 23만 대 규모의 생산공장을 운영하며 현지 시장 점유율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렸다.

현대차 측은 최근 비공개로 열린 애널리스트 간담회에서 “러시아 시장 비중은 전체의 4%에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향후 성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인내심을 갖고 대응하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러시아에서 버틸 경우 글로벌 불매 운동의 타깃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부품 부족을 이유로 현지 공장을 사실상 무기한 멈춘 것이 이런 고민의 결과다.

러시아 정부는 전쟁 직후부터 국내 기업들의 현지 동향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규/박신영/강경민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