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다국적 기업들, 다시 장벽 높이는 각국 정부에 '휘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에 '값비싼 청구서'를 들이밀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각국 정부가 국가안보와 경제보호 등을 이유로 장벽을 높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를 통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이후 '자유무역주의·다자주의 통상 체제가 시장 파이를 더 키울 것'이란 미국 글로벌 기업들의 꿈은 산산히 무너졌다"고 보도했다. 애플 엑슨모빌 등 많은 미국 기업들은 지난달 24일 전쟁이 시작되고 불과 며칠 만에 "러시아 사업을 중단하거나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이코노미스트는 "1989년 소련 붕괴, 1993년 북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연이은 이벤트들로 하나의 통합된 글로벌 시장을 꿈꿨던 다국적 기업들은 이제 가혹한 조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전했다.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등의 정치인들이 코로나19, 전쟁 등 연이은 외부 압력으로부터 자국 안보와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장벽을 앞다퉈 법제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해외 공급망에 의존하는 대신 미국 안에서 해내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지난 1일 국정연설 발언은 국가지도자가 보호무역주의를 장려한 대표적 사례"라고 꼬집었다. 지정학적 위기와 보호무역주의 흐름으로 인해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대부분 휘청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내수 시장에 집중된 미국 기업들의 주가는 올들어 5% 하락하는 데 그친 반면, 해외 수익에 의존하는 미국 기업들의 주가는 3배 가까이 급락했다.


미국 기업의 수익성에서 해외사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 상무부 경제분석국(BEA)에 따르면 2021년 3분기 기준 전체 미국 기업(비상장사 포함)의 영업이익의 18%만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3년전 24%에 비해 감소한 것이다. 코로나19 여파, 달러 강세, 글로벌 최저 법인세율 도입 논의 등이 영향을 미쳤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지정학적 위험이다.

당장 러시아에서의 사업 중단으로 미 기업들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고 있다. 엑슨모빌은 "사할린1 프로젝트 개발 중단으로 인해 회사가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 당국의 자산 압류 등 보복도 미국 기업들이 우려하는 지점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경제 규모가 러시아의 10배에 달한다"면서 "미국-중국의 관세 전쟁도 당장 심각하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러·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국수주의적 국가인 한국과 EU, 미국도 반도체의 자국 내 생산을 독려하는 등 각자 산업군 별로 국익에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분야의 자립도를 키우기 위해 장벽을 높이는 것도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공급망 재편 등을 위한 재투자는 비용과 과정 모두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프랑스 인시아드의 스튜어트 블랙 교수는 "중국의 방대한 숙련 노동자 풀을 따라잡을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