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데뷔 천명관 "영화는 2시간의 장르…소설과 다르더군요"

누아르 영화 '뜨거운 피'로 첫 연출…"감독이 되나니 인생 참 재밌어요"
"진짜 건달들 이야기…여성 캐릭터 한계 인정, 앞으로 채워나갈 것"
"제가 신인 감독으로 영화를 만들게 됐다는 게…. 인생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드네요. "
소설 '고래',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등으로 유명한 작가 천명관(58)은 독특한 이력을 자랑한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30대에 돌연 충무로 영화사에 들어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마흔 살에는 처음 써본 단편소설 '프랭크와 나'로 등단에 성공해 이후 15년간 소설가로 살았다.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 그는 영화감독 데뷔를 앞뒀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누아르 영화 '뜨거운 피'에서 처음으로 연출을 맡았다.

30년간 간직한 영화감독의 꿈을 비로소 이루게 된 것이다. 천 감독은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직 정신이 없어서 감회를 느낄 만한 여유가 없다"면서도 "그래도 결과물을 보고 나니 설레고 후련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기회는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왔다. 동료 작가 김언수가 자신의 소설 '뜨거운 피'를 바탕으로 만드는 영화를 연출해줄 것을 천 감독에 먼저 부탁해온 것이다.

천 감독은 "영화를 한 편도 만들어본 적 없는 저에겐 뜻밖이라 놀라기도 했다"며 "그런데도 수락을 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뜨거운 피'는 1990년대 초 부산 변두리의 작은 포구 '구암'을 두고 벌어지는 밑바닥 건달들의 치열한 생존 싸움을 그렸다.

주인공 희수(정우 분)가 돈과 야망을 좇아 여러 차례 살인을 저지르고 다른 조직과 전쟁을 벌이면서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이 담겼다.

"여러 영화에서 건달들이 검은 양복 차림으로 몰려다니고, 현실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싸움을 하는 모습이 나왔지만, 전 그게 공허하다고 느꼈어요.

원작에는 제가 생각하는 건달의 이야기가 잘 녹아 있었습니다.

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진짜 어른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죠."
마틴 스코세이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같은 누아르 영화 거장들의 팬이라는 그는 "이들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이나 표현도 많이 참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시나리오 작가와 소설가로 살아온 그가 하루아침에 감독이라는 새 직업을 갖게 된 만큼 어려움도 따랐다고 한다.

천 감독은 "영화는 보여주는 시간이 두 시간으로 정해진 장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며 "그게 가장 결정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강조했다.

"전 소설을 쓰면 길게 쓰는 편이라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거든요.

이 사람, 저 사람의 과거와 배경 같은 걸 친절하게 설명할 수 있죠. '뜨거운 피' 시나리오를 쓸 때 시간을 엄격하게 정해 놓지 않았더니 최종 편집본의 러닝타임이 3시간 30분이나 나오더군요.

그걸 2시간으로 편집하는 지난한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
언론배급 시사회 후에는 '뜨거운 피'에 녹아 있는 여성관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영화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이 남자 주인공을 각성시키는 도구나 배경으로만 기능하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천 감독은 "사실 저도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이라며 "원작에 기대다 보니 일단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위 '알탕 영화'라고 하죠. '뜨거운 피'도 그 범주에 있는 것 같아요.

여자들이 조연으로 머무르고 희생자, 각성의 도구가 됐다는 점에 있어서는 한계를 인정합니다.

여성의 역할이 좀 더 주체적이고 강하면 어떨까도 고민했습니다만, 90년대 부산 건달들의 삶을 생각했을 때 개연성이나 시대성이 이 영화에서 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그는 "저의 여성관이 아니라 건달들의 여성관일 뿐"이라며 앞으로 연출할 다른 영화들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천 감독은 2016년 내놓은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는다.

원래 천 감독이 영화 데뷔작으로 생각하고 시나리오 작업을 해온 작품이다.

대표작 '고래',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천 감독은 각본, 연출 등의 제안을 받았지만, 고심 끝에 맡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소설을 쓰느라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시 이걸 붙잡고 2∼3년 혹은 더 긴 세월을 보내는 게 아깝네요.

하하. 제가 쓴 작품을 다른 사람들이 만든 걸 보고 싶어요.

전 새로운 이야기가 하고 싶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