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전쟁에서 어떻게 문화를 지킬까

서화동 문화스포츠부장
간송 전형필 선생이 6·25전쟁 때 ‘훈민정음해례본’을 피란길에서 내내 가슴에 품고 다니며 지켜내지 않았다면, 빨치산 잔당 토벌을 위해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던 김영환 대령이 상부의 명령대로 해인사를 폭격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다.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해례본도,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야만적 폭력성이 가장 극렬하게 표출되고 충돌하는 것이 전쟁이다. 그 속에서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세계는 지역마다 걸출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독일 쾰른을 초토화하면서도 쾰른대성당만은 남겨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이 일본 교토 폭격을 자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경주에 비견되는 고도(古都) 교토의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반면 2001년 3월 아프간을 점령한 탈레반 군사정권의 바미안 석불 파괴는 세계사의 가슴 아픈 오점으로 남았다.

위기의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의 국립 안드레이 셰프티츠키 박물관에선 러시아의 공습이 시작된 직후 소장품을 철제 상자에 담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느라 분주했다. 1905년 설립된 이 박물관의 소장품은 17만여 점. 우크라이나 최대 규모다. 비교적 안전한 것으로 여겨졌던 르비우도 지난 19일 폭격을 당하면서 인명은 물론 소장품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소장품을 겹겹이 포장해 안전한 장소에 숨기거나 지하 카페를 벙커로 개조해 작품을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 미술관 내부에서 직원들이 숙식을 함께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품을 지키려는 곳도 적지 않다.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에서는 도시의 랜드마크인 리슐리외 공작 동상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려 덮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화유산 파괴는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달 28일 키이우주의 이반키우 역사·지역사 박물관에선 민속화가 마리아 프리마첸코의 작품 25점이 전소됐고, 러시아군이 공격하는 도시마다 문화재와 예술품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격화되는 반러시아 문화전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쟁에 반대하는 진영과 러시아 간 문화전쟁으로도 비화되고 있다. 프랑스, 스페인, 영국, 오스트리아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러시아 국영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에서 지난 4일 개막할 예정이던 대규모 전시를 위한 미술품 대여를 철회했다. 반면 러시아 소유의 미술품 200여 점은 프랑스 파리에서 발이 묶여 양국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의 박물관 측은 러시아에서 빌려온 세잔, 모네, 피카소, 반 고흐 등의 작품들을 모스크바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러시아에 체류 중인 프랑스인들의 안전을 위한 담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기 반환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전 세계의 반(反)러시아 문화전쟁은 갈수록 확대되는 모양새다.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를 비롯한 친(親)푸틴 인사들의 공연계 퇴출이 잇따르고 있고, 러시아 최고 발레리나로 꼽히는 올가 스미르노바(30)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며 볼쇼이 발레단을 탈퇴해 네덜란드 발레단으로 옮겼다. 평화를 위해 푸틴의 자비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전쟁으로부터 어떻게 문화를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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