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의 규제 개혁 상징어는 진화해 왔지만… [여기는 논설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21일 경제단체장 오찬 모임에서 기업들을 국가대표 선수에 비유하면서 “운동복도 신발도 좋은 것을 신겨 보내야 하는데 모래주머니 달고 메달 따오라 하고 있다”고 했다. 간담회 뒤엔 페이스북을 통해 “신발 속 돌멩이 같은 불필요한 규제들을 빼내 기업들이 힘껏 달릴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도 했다.

전현직 대통령들은 당선인 시절부터 규제혁파에 대한 강한 의지를 천명하며 상징어들을 유행시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대형트럭 이동을 방해하는 대불국가산업단지의 ‘전봇대’를 언급한 뒤 정권 내내 규제개혁 상징어가 됐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중소기업을 살리려면 거창한 정책보다 손톱 밑 가시를 빼야 한다”고 한 뒤 ‘손톱 밑 가시’가 그 역할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초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시사하며 ‘붉은깃발(적기조례)’론을 다시 소환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신발 속 돌멩이’이란 표현이 부각될 듯 하다. 이렇게 매 정권마다 규제혁파를 부르짖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규제는 늘어나기만 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기치로 내건 이명박 정부때 조차 규제가 15% 가량 증가했다. 문재인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제’로 기업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모래 놀이터를 지향한다고 해놓곤, 실제론 친노조, 반기업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 버렸다. 현 정부들어 국회에 발의된 규제법은 총 4170건으로, 직전 정부(1313건)의 3배를 넘는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감을 준 ‘자연사 박물관’ 갈라파고스섬이 한국에만 있는 규제를 수식하는 대명사가 된 것은 참으로 웃픈 현실이다. 파업 시 대체근로 금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한국에만 있고, 다중대표소송제는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 및 3% 룰은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있는 제도다. 분식회계를 막는다며 도입한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도에 대해 외국 학자들은 한국을 ‘회계의 갈라파고스’, ‘흥미로운 회계 시험장’이라는 조롱 섞인 눈초리로 바라본다. 역시 한국에만 있던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제한은 주무부서인 중소벤처기업부가 수년째 책상서랍에 묵혀 두다가 대선 뒤에서야 풀렸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처벌 만능주의, 중복 규제, 모호한 규정 등 ‘규제 공화국’ 법률의 폐해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악법이다. “중대재해법은 사업자에게 한국에서 더 이상 사업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회가 찍어 낸다고 다 법률인 것은 아니다.”(최준선 성균관대 명예교수) 한국만의 ‘갈라파고스 규제’에 대해 해외에선 ‘오잉크(OINK:only in Korea)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안타깝게도 기업 규제로 올림픽을 연다면 금메달은 따논 당상이다. 기업들을 억누르는 규제는 이처럼 산더미 같은데 기업의 요구에 대해선 참으로 인색하다. 쿠팡이 국내 증시 대신 뉴욕 증시에 상장한 것은 차등의결권 때문이다. 차등의결권은 벤처업계의 숙원중 하나지만, 현 여당은 선거 시즌에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들어줄 듯 해놓곤, 끝나면 재벌 특혜로 악용될 수 있다며 딴청을 부린다. 쿠팡이 차등의결권 때문에 뉴욕 증시에 상장하면서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코로나 19, 북핵위협과 함께 규제 일변도의 한국 기업환경을 리스크로 꼽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새 정부의 경제 기조는 민간주도 성장으로 잠재성장률을 끌어 올리겠다는 것인데, 올바른 방향 설정이다. 잠재성장률의 3대 요소는 노동, 자본, 생산성이다. 저출산·고령화 사회에서 노동 요소의 증대는 기대하기 틀렸고, 자본투자도 한계가 있다. 결국 생산성 향상밖에 기댈 것이 없는데, 생산성 즉 경제시스템의 효율을 높이긴 위해선 기업인과 기업인이 적극 뛰게 해 줄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그 핵심이 바로 규제개혁인 것이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 규제 혁파에 성공하려면 관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열쇠다. 윤 당선인이 리더십을 발휘할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새 정부의 성패는 결국 경제에 달렸고, 그 최대 동력은 규제 혁파다. 갈라파고스섬의 신발 속 돌멩이들을 얼마나 치워내느냐에 정권 운명이 걸린 것이다.

윤성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