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 무게 30배나 꿀 저장하는 '육각형의 비밀' [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수정
지면A26
■ 동물들의 창의적 건축법‘열흘 만에 버리는 것은 누에의 고치다. 여섯 달 뒤에 버리는 것은 제비의 둥지, 1년 후에 버리는 것은 까치의 집이다. 그런데도 애써 창자에서 실을 뽑아내고, 침으로 진흙을 반죽한다. 부지런히 띠풀을 물어오느라 주둥이가 헐고 꽁지가 빠져도 피곤한 줄 모른다.’
밀랍 녹여가며 표면장력 활용
최소 재료로 최대 공간 확보
누에고치는 10일, 제비는 반년
까치는 1년짜리 새집 매번 지어
새둥지 속 솜털은 최고 단열재
개미탑엔 온도 조절 육아방도
고두현 논설위원
다산 정약용의 ‘중수만일암기(重修挽日菴記)’에 나오는 구절이다. 다산은 이를 통해 ‘하찮은 동물도 이렇게 정성을 다해 집을 짓거늘 100년을 살다가는 인간은 어떤가’ 하고 우리에게 묻는다.누에는 고치 속에서 번데기로 10여 일 머물다 나와 나방이 된다. 고치 하나의 무게는 약 2.5g에 불과하지만 거기서 실이 1500m나 풀려 나온다. 이 실로 명주를 짜서 비단옷을 만드니 ‘열흘 사는’ 누에의 집이 비단만큼 진귀하다.
제비는 6개월간 살 집을 진흙과 지푸라기로 만든다. 음력 9월 9일(중양절)에 강남 갔다 이듬해 3월 3일(삼짇날) 돌아와 반 년짜리 둥지를 새로 튼다. 한곳에 머무는 까치도 매년 새집을 짓는다. 헌 둥지는 기생충 때문에 재사용하지 않는다. 둥지 밖은 나뭇가지 수천 개를 구해와 엮고 안에는 풀, 진흙, 동물의 솜털을 깐다. 이게 최고의 자연산 단열재다.
가장 뛰어난 건축가 '벌·새·개미'
이들의 집은 생존에 필요한 주거 공간이자 번식을 위한 보금자리다. ‘보금자리’라는 말 자체가 ‘새가 알을 낳거나 깃들이는 곳, 지내기에 매우 포근하고 아늑한 곳’을 가리킨다. 꿀벌과 개미도 창의적으로 집을 지으며 과학적인 원리를 총동원한다. 그래서 벌·새·개미 등을 가장 뛰어난 건축가라고 부른다.꿀벌은 자기 몸에서 나오는 밀랍으로 집을 짓는다. 자세히 보면 벌집은 모두 육각형으로 이뤄져 있다. 이는 가장 경제적이고 과학적인 구조다. 벌들은 벌집 무게의 30배나 되는 꿀을 저장할 수 있다.
벌집의 과학적인 구조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파포스라고 한다. 그는 《수학집성(數學集成)》에서 “벌들의 꿀 저장소는 불순물이 끼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연이어 있는데 동일한 점을 둘러싼 공간을 빈틈없이 채울 수 있는 정육각형이야말로 가장 많은 꿀을 채울 수 있는 구조”라고 분석했다.1965년 헝가리 수학자 페예시 토트는 “최소의 재료를 가지고 최대의 면적을 지닌 용기를 만들려 할 때 그 용기는 육각형이 된다”며 벌집 구조의 신비를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최근엔 영국 연구팀에 의해 꿀벌들이 애초에 둥글게 지은 벌집 구조가 표면장력에 의해 자연스레 육각형으로 변한다는 사실까지 규명됐다.
벌집의 육각형은 다른 분야에도 활용되고 있다. 가벼우면서 강도가 높은 골판지는 가장 균형 있게 힘을 배분하는 육각형의 안정적인 공간을 응용한 것이다. 이런 구조는 ‘허니 페이퍼(honey paper)’나 ‘허니콤(honeycomb)’으로도 불린다.
고속열차 KTX 앞부분의 충격흡수장치인 허니콤 역시 벌집 구조로 돼 있다. 시속 300㎞로 달리는 열차가 700㎏의 물체와 부딪혀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을 정도다.
가우디 "자연의 신비에서 배워"
벌집 형태를 지닌 건축물 중 최근에 뜬 명소는 미국 뉴욕 허드슨 야드의 베슬(Vessel)이다. 2019년에 완공한 이 육각형 나선형 구조물은 16층(약 46m)으로 구성돼 있다. 뉴욕 시가지와 허드슨강을 다양한 각도로 굽어볼 수 있어 ‘뉴욕의 에펠탑’으로도 불린다.스페인 건축가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첨탑 12개가 벌집과 옥수수 형태로 세워져 있다. 가우디는 늘 “아름다운 형태는 구조적으로 안정돼 있어야 하는데 이는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그의 말처럼 동물들의 건축은 자연친화적이면서도 효율성과 안정성이 높다. 호주의 성당흰개미는 몸길이가 4.5㎜밖에 안 되지만 높이 10m의 거대한 탑을 세운다. 탑 안에는 공기 순환 구멍이 있고, 지하엔 식량창고와 여왕개미의 산란실이 있다. 온도와 습도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보육실까지 갖췄다.
남미에는 ‘인간에게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는 지혜를 주기 위해 신이 붉은가마새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한때 집 벽의 갈라진 틈에 사는 곤충 때문에 전염병이 많았는데, 벽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 붉은가마새의 둥지를 흉내 내서 집을 지었더니 전염병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생각의 집'까지 넓혀주니…
동물들의 창의적인 건축법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단순한 건물의 구조를 넘어 ‘생각의 집’까지 넓혀준다. 그 명명과 글자에 담긴 뜻도 깊고 넓다.누에는 한자로 ‘잠(蠶)’이다. 이를 기르는 것을 양잠(養蠶), 그 장소를 잠실(蠶室)이라고 한다. 잠식(蠶食)이라는 말은 누에가 뽕잎을 먹듯이 조금씩 침략해 먹어 들어간다는 뜻이다. ‘누에나방의 눈썹’을 의미하는 아미(蛾眉)는 가늘고 길게 굽어진 미인의 눈썹을 말한다.
‘제비 연(燕)’에도 즐겁고 아름답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새끼들을 돌보느라 둥지 밖으로 내민 꼬리처럼 두 갈래로 길게 내린 남성 예복이 곧 연미복(燕尾服)이다. 이는 큰 연회와 무대 지휘 때 입는다.
‘까치 작(鵲)’은 칠석날 은하수의 오작교(烏鵲橋)와 이어진다. 1년에 한 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를 위해 까마귀와 까치가 다리를 놓는다니 그 상상력에 경계가 따로 없다. 이제 곧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예부터 제비가 집에 들어 보금자리를 트면 좋은 일이 생긴다 해서 길조(吉鳥)라고 했다. 까치도 길조다. 꿀벌 또한 연인들의 달콤한 밀어(蜜語)와 밀월(蜜月) 등 좋은 뜻을 보듬은 말이다.
올봄에는 코로나 여파를 말끔히 씻고 좋은 일, 기쁜 일, 달콤한 일이 많아지면 좋겠다. 새 둥지에서 출범하는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권 모두가 ‘생각의 창’을 넓힐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