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째 떠도는 불법촬영물, 좀먹는 일상…"차라리 몰랐다면"

영상 빌미로 협박까지…끊임없는 '유사 n번방'들 피해
"불법촬영물 형량 강화에 사회적 공감대 필요"

"작년 11월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협박을 받았을 때 제 모습이 찍힌 불법 촬영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무려 3년 전에 찍힌 영상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는 걸 알고 아주 많이 놀랐습니다.

"
A씨는 4일 담담히 자신의 불법 촬영물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인터넷에서 주기적으로 피해 영상을 검색한다는 A씨는 지난달 말에도 자신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발견했다. 그는 "인터넷에서 영상이 영영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며 "자신을 촬영한 영상이 있다는 걸 아는 게 더 끔찍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다른 피해자들은 차라리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슷한 피해를 막기 위해 불법 촬영물을 단순히 소지하거나 보는 가해자들에 대한 형량도 강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n번방' 2년 됐지만…현재 진행형인 수천수만개의 'n번방'들
A씨는 이른바 '제2의 n번방' 사건의 피해자다.

가해자 B씨는 약 1년 반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B씨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불법 촬영물들을 피해자의 이름과 직장 등 신상정보와 함께 인터넷에 유포했다.

B씨에게 이런 피해를 본 이들이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수십 명에 이르며, 경찰은 영상 재유포 등과 관련된 수사를 진행 중이다.

n번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수천수만개의 'n번방'들이 도처에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운영하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 따르면 2020년 지원센터를 찾은 피해자는 4천973명으로, 전년 대비 약 2.4배 늘었다.

특히 피해 유형 중 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은 경우는 2019년 354건에서 2020년 967건으로 2.7배 늘어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센터 관계자는 "가해 양상이 단순 유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 영상을 빌미로 추가 촬영물이나 금전을 요구하며 협박하는 방식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피해 영상을 삭제하기 위해 '디지털 장의사'나 온라인 기록 삭제 전문 업체의 문을 두드리는 피해자들도 많다.

온라인기록삭제 업체인 산타크루즈컴퍼니의 김호진 대표는 "요즘 상담 문의 전화가 꾸준히 늘어 한 달에 100∼150건 수준"이라며 "호기심에 화상채팅 등을 했다가 피해를 본 미성년자도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 사후 대처만으론 부족…"형량 강화에 사회적 공감대 있어야"
최근 경찰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 피해 영상물 속에 나온 얼굴을 인식해 인터넷 곳곳에 유포된 게시물을 찾아 삭제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활용 중이다.

이처럼 경찰의 관련 수사 기법이 진화하고 전담팀 운영 등 여건이 개선되고 있지만, 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불법 촬영물 소비와 재유포가 끊임없이 이뤄지는 현실에서 삭제는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국회에서는 불법 촬영물 관련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송옥주 의원은 불법 촬영물이 유통되는 온라인 사이트에도 책임을 물어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대표발의했고, 같은 당 강선우 의원의 법안에는 성관계 음성을 무단으로 녹음·유포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이 담겼다.

현재 법률 체계를 더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불법 촬영물 관련 처벌 수위 자체가 낮은 것은 아니지만, 가해자들에게 법 적용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며 "n번방 사건도 주범 조주빈만 엄벌했고 다른 이용자들은 기껏해야 벌금형에 그쳤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성 착취물의 경우 처음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하지만, 재유포되면 단순 음란물 소비로 인식된다"며 "가해자들에게 징역형 이상의 처벌을 하려면 불법 촬영물 피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충분히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