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경영'의 롯데는 왜 '디테일 경영'에 실패했나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사진=연합뉴스
롯데는 디테일(detail)에 약하다. 좋게 보면 선이 굵고, 부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전술 구사가 세밀하지 못하다. 롯데월드타워의 미로형 대형 주차장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때 잠실 롯데백화점이 VIP 고객을 신세계 강남점에 뺏긴 건 주차한 곳을 쉽게 찾지 못할 만큼 디테일이 약했던 주차장 탓이 크다. 롯데백화점, 마트가 중국, 베트남 등 해외에 진출할 때도 비슷한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베트남만 해도 현지인들은 신선식품을 만져보고 사고 싶어 하는데 롯데는 한국식 진열을 고집했다.

롯데가 운영하는 골프클럽인 김해 스카이힐도 롯데의 디테일 부족을 보여주는 사례다. 회원제임에도 대중제처럼 밤늦도록 야간 조명을 밝혀가며 매출을 올리자 지역민들의 원성을 샀다. 한때 KLPGA 대회를 열었던 ‘명문의 향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숫자, 달리 말해 실적에 집착하는 롯데의 조직 문화가 빚어낸 ‘웃픈’ 얘기다. 1967년 롯데제과에서 올해로 창립 55주년을 맞은 롯데그룹은 숫자 중시를 디테일 경영으로 치환했다. 이와 관련해 두산주류를 흡수합병한 롯데칠성음료에 회자하는 얘기가 있다. ‘두산파’가 CEO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면 ‘정통 롯데파’들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구체적인 숫자조차 없이 허황한 미래 비전을 설명하다니…” 한때 시장을 호령했던 두산주류는 롯데그룹에 편입된 이후 1위 자리에서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창의는 수많은 유(有)의 조합

요즘 현대 경영에서 말하는 ‘디테일’은 연결과 융합의 기초다. 상사가 부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감시하고, 사장이 과장처럼 꼼꼼하게 모든 것을 챙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얘기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체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걸림돌을 치운다거나 사소해 보이던 현상과 데이터를 서로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서비스와 상품을 만들어내는 혁신이 디테일 경영이다. 창의는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유(有)의 결합이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은 대부분 일상적인 대화에서 나온다. 일방적인 보고가 아니라 쌍방향의 평범한 대화 속에서 아이디어가 탄생한다는 얘기다.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랜드그룹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박성수 이랜드 회장은 매일 신문을 숙독하고, 수많은 책을 읽으며 세상사에 박식한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하지만 그는 바깥과 소통하지 않는다. 내부와도 단절돼 있다. 다행히 이랜드가 최근 40대 CEO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이랜드의 오랜 침체는 소통 부재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재계 5위인 롯데는 왜 디테일에 부족한 것일까. “껌 파는 회사여서 소수점 이하 단위까지 신경 쓴다”라는 비아냥을 낙인처럼 받아왔던 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세밀하지 못하다는 비판은 롯데에 다소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고(故) 신격호 창업주 시절부터 그룹 회장이 한·일 롯데 경영을 총괄해야 했다는 점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셔틀 경영’은 물리적으로 시공간을 제약할 수밖에 없다. 일본식 조직 문화의 유산도 원인으로 꼽힌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롯데는 평생직장에 대한 대가로 상명하복의 문화를 당연하게 여겼다. 대화와 소통보다는 정해진 스케줄대로 직급에 따라 아래에서는 보고하고, 위에서는 지시를 내리는 방식에 익숙했다.

김상현 유통HQ 부회장이 뿌리는 혁신의 싹

업(業)의 특성도 롯데의 조직 문화를 형성한 주요 요인 중 하나다. 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만 해도 늘 시장 1등이었다. 당시 롯데제과는 유럽, 미국, 일본의 선진 기술을 습득해 ‘K-제과’로 탄생시킨 혁신 기업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과 등 롯데의 식품사들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롯데를 비롯해 국내 식음료 제조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실수”라며 “가만히 있기만 하면 매출이 자동으로 나오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롯데의 유통 부문도 마찬가지다. 롯데쇼핑이 1등의 지위를 가진 백화점은 사실 유통이라기보다는 부동산업에 가깝다. 좋은 목에 번듯한 건물을 지어놓으면 패션, 뷰티, 식품사들이 경쟁적으로 물건을 팔러 들어왔다.최근 신동빈 회장이 조직 문화 혁신을 강조하고 있는 건 오랜 롯데의 관행을 깨려는 시도다. 신 회장은 올 초 사장단 회의에서 “나는 어떤 CEO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었다. 일방향적 소통을 하는 경영자인가, 조직의 현재를 관리하는 경영자인가, 재무적 성과만 중시하는 경영자인가 등을 물었다. 말뿐만 아니라 조직 변화를 위한 행동에도 나섰다. 신 회장은 그룹 유통 부문을 총괄할 HQ장(부회장)에 롯데 창립 이래 처음으로 비(非)롯데맨인 김상현 부회장을 선임하는 등 전에 없던 인사 실험을 진행 중이다. 김 부회장이 롯데쇼핑에 어떤 변화와 혁신의 싹을 심느냐는 향후 롯데그룹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