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불편한 직장인들 공동구매…삼성맨도 탐내는 '의자' [실리콘밸리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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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애플·SK하이닉스엔 있고요즘 한국 산업계에서 '직원 복지 수준의 척도'로 꼽히는 의자가 있다. 미국의 유명한 가구·조명업체 허먼밀러(HermanMiller)의 사무실 직원용 의자 '에어론'이다. 별도 구매해야하는 머리 받침대를 제외한 본체만 모델별로 1195~2195달러(공식 홈페이지 정가 기준, 145만~266만원)에 달하는 초고가 제품이다.
삼성전자엔 없는 허먼밀러 '에어론' 의자
최고 266만원 고가에도 인체공학적 설계로 인기
구글 애플 등이 먼저 도입…'수평적 문화'의 상징
임원 직원 구분 없이 함께 보급
'실리콘밸리 의자'로 입소문
이름 꽤나 알려진 한국 기업들도 허먼밀러를 애용한다. 네이버가 대표적이다. 2005년께 허리가 불편한 직원들이 공동으로 에어론을 사서 쓴다는 얘기를 들은 당시 NHN 경영진이 전 직원들에게 지급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BTS 소속사로 유명한 하이브도 용산 신사옥에 허먼밀러를 배치해 화제가 됐다. 최근 반도체 기업 SK하이닉스가 노사협의를 통해 '허먼밀러 전 사업장 보급'을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경쟁업체 삼성전자 직원들이 부러워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독창성과 기능성 결합된 '가구 혁신'의 상징
에어론은 어떤 의자기에 사무 직원들이 탐내는 명품 아이템으로 자리잡았을까. 핵심은 사용자의 편안함을 고려한 인체공학적 설계다. 허먼밀러의 혁신의 역사와 디자인 철학이 녹아 있는 제품이다.허먼밀러의 전신은 1905년 설립된 '미시간 스타 퍼니처'다. 이 회사에서 일했던 더크 얀 디 프리가 1923년 장인(丈人) 허먼 밀러의 자금 지원을 받아 회사를 인수한다. 이후 장인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의미에서 허먼밀러로 사명을 바꾼다.
지금의 위상을 갖게 된 건 모더니즘 경향을 가진 디자이너들을 영입하면서부터다. 1930년 영입된 길버트 로데가 길을 닦았다. 그의 사후인 1945년 창업자 디 프리는 유명 잡지 '라이프'에 글을 기고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조지 넬슨을 영입했다.신진 디자이너였던 넬슨은 혁신적인 가구를 디자인해 시장에 선보였고 시장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넬슨이 찰스 임스와 레이 임스 부부를 영입한 건 '신의 한수'로 불린다. 영입 이후 허먼밀러는 전성기를 맡게된다.
예술성과 실용성을 중시한 임스 부부는 독창적이면서도 사용자의 편안함을 고려한 의자를 계속 출시한다. 허먼 밀러가 미국을 대표하는 명품 가구 브랜드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목재 합판을 휘어지게 하는 기술을 통해 사람들의 엉덩이를 편하게 감싸주는 'LCW'가 대표적인 사례다.
"실리콘밸리 수평적 문화의 아이콘"
1994년 탄생한 에어론도 허먼밀러의 정신이 살아있는 제품으로 평가된다. 사람이 의자에 앉았을 때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을 해소하기 위한 '인체공학적' 설계를 기반으로 탄생됐다. 졍형외과 의사들과 혈관 전문가들까지 동원해 사무직 근로자의 허리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한다.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소재 펠리클을 써서 체중을 분산시키고 바람이 잘 통하게 한 점도 혁신 포인트로 꼽힌다. 처음엔 '무슨 의자가 저렇게 생겼냐'는 비아냥까지 들었지만 29년이 지난 현재까지 세계 최고의 사무실 의자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디자인 전문가 김신씨가 2017년 디자인프레스에 기고한 글을 보면 허먼밀러의 에어론은 '조직 민주화'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직원들의 상하 관계보다 수평 관계를 중시하는 구글, 애플 등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창업 초기 허먼밀러를 임원 직원 구분없이 보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에어론은 사용자의 편안함을 중점적으로 고려한 '기능 혁신'에 더해 '수평적 조직'이라는 실리콘밸리 기업 문화가 녹아 있는 아이콘인 것이다. 지금이야 허먼밀러의 에어론이 '네이버 의자', 'BTS 의자' 식으로 불리지만, 한국에서 2000년대 초반 입소문을 탈 때 '실리콘밸리 의자'로 알려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한국 기업 조직 문화에도 '유연성' 필요
200만원대 실리콘밸리 의자를 속속 도입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의 조직 문화도 실리콘밸리와 유사하게 변하고 있을까(물론 실리콘밸리에도 수직적 문화를 가진 기업이 없는 건 아니다).팬데믹 이후 근무 형태의 대세가 되고 있는 리모트(원격) 근무 관련 진행상황을 통해 비교해볼 수 있다. 구글은 지난 4일(현지시간)부터 본사 직원들 대상으로 주 3일 출근 원칙으로 재택과 사무실 근무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제도를 시작했다. 애플도 다음주부터 주 1회 출근을 시작하고, 5월말까진 주 3회 출근을 시행할 계획이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선도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실리콘밸리만의 현상'은 아니다. 구글이 시장조사업체에 의뢰해 2021년 9월부터 10월까지 세계 12개국의 전문직 종사자 1200여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7%는 '3년 내에 자신이 일하는 업종의 대부분 조직에서 하이브리드 업무 모델이 표준 관행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2년 간의 팬데믹을 겪으면서 재택근무의 장점을 깨닫게 됐고 이를 사무실 근무의 장점과 결합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 상황은 어떨까. 한국 주요 대기업들은 여전히 하이브리드 근무에 대해 '보수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직접 만나서 회의를 하고 밥을 함께 먹고 야근을 해야 회사 생활을 하는 것 같은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많은 대기업들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했지만 조직 문화는 지나치게 한국적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기업의 뿌리가 실리콘밸리와 다른 제조업이라는 점, 목표를 향해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조직 문화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차이가 너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리콘밸리에서 대세가 된 하이브리드 근무가 상징하는 것은 결국 조직의 '유연함'이다. 오랜 기간 유지해온 기업 문화에 선진 기업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접목할 수 있는 유연함이 생긴다면 한국 기업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200만원 넘는 실리콘밸리 의자도 좋지만 더 필요한 건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문화"라는 목소리가 투정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허먼밀러는 나스닥에 상장사다. 티커는 MLKN이다. 시가총액은 5일 오전 11시30분(미국 동부 시간) 기준 25억7000만달러(약 3조1200억원)다. 연초 이후 주가는 약 15.5% 하락했고, 최근 1년을 보면 약 20% 빠졌다. 최근 3개월 간 증권사 한 곳이 분석보고서를 내는 데 그칠 정도로 투자자들에게 인기 있는 상장사는 아니다. 한국경제신문의 실리콘밸리·한국 신산업 관련 뉴스레터 한경 엣지(EDGE)를 만나보세요! ▶무료 구독하기 hankyung.com/newsletter
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