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英부커상 최종후보 발표…해외에서 주목한 '이 아픈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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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 인터뷰내일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숏리스트)가 공개된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콩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다. 2016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며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다. 올해 1차 후보에는 이례적으로 한국인 작가의 작품 두 편이 이름을 올렸다.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와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매년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책들 중 후보로 꼽힌 것 자체가 영광으로 여겨진다.
“판타지소설 기괴하다고요?
현실이 더 이상하지 않나요?”
“낯설고 사나운 세상서 고군분투하는
쓸쓸한 독자에게 위안이 되길”
특히 정 작가의 <저주토끼>는 역주행 중이다. 2017년 출간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부커재단 발표 이후 알라딘 국내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인 등단을 거치지 않고 무명에 가까웠던 정 작가는 이제 국내외 독자들이 눈여겨보는 세계적 작가 대열에 들어섰다."서점에서 서있던 제 책들이 이제는 편히 누워 있어요." 숏리스트 발표를 하루 앞둔 6일 정보라 작가에게 '변화를 체감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서점 구석 책장에 꽂혀 있던 <저주토끼>가 이제는 매대 중앙에 진열돼있다.
하지만 부커상 후보 소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장르문학이라는 이유로 주목이 덜했을 뿐 정 작가는 환상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웹진이나 잡지에 꾸준히 판타지·공상과학(SF) 작품을 발표해왔다. <저주토끼>에는 표제작 '저주토끼'를 비롯해 총 10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중 '머리'는 대학생이던 1998년 연세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정 작가는 "20여년간 써온 글 중 아주 일부를 책으로 묶어낸 것"이라고 했다.
<저주토끼>에는 저주, 괴물, 유령 등 기괴하고 섬뜩한 소재와 사건이 출몰한다. 이런 비현실적 상상은 순식간에 기존 질서를 뒤집어놓다. 일상이 낯설어진다. 현실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정 작가는 "평범한 소재를 정반대의 방향으로 데려다놓는 방식으로 소설을 구상한다"고 했다. 단편 '머리' 속 변기가 오물을 내리는 구멍 대신에 낯선 존재가 올라오는 통로가 된 것처럼.부커재단은 <저주토끼>에 대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해 현대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이야기한다”고 평했다.
저주는 약자의 마지막 무기다. 힘 있는 자에게는 보복의 수단도 많다. 등장인물이 기댈 수 있는 건 저주뿐이다. 표제작 '저주토끼'에는 억울한 모함으로 삶이 망가진 인물을 대신해 저주를 실행하는 토끼가 등장한다. 토끼는 비윤리적 기업가의 집에 숨어들어 온갖 서류와 그 서류 위에 세워진 기업을 갉아먹는다.
비일상적 소재가 덧셈의 영역이라면, 필수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뭔가를 제거해버리는 뺄셈의 소설들도 있다. 여성이 홀로 자녀를 생산하는 '머리'와 '몸하다'가 대표적이다. '몸하다'에서 주인공은 의지나 상대 없이 임신한다. 아이는 이미 존재하는데 사회에서는 끊임 없이 아버지의 자리를 채울 것을 채근한다. 그 와중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로 대를 잇고 싶다며 주인공을 찾아온 노인 등이 아버지 후보로 등장하며 '정상적 출산과 가족이란 무엇인지' 의심하게 한다. 주인공의 존재 자체가 가부장제를 향한 저주인 셈이다.정 작가는 "뚜렷한 메시지나 주제 의식을 먼저 정해두고 글을 시작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세상은 때로 이해할 수 없이 잔혹하고, 그 세상에 열이 받거나 혼란스러울 때마다 글을 썼다"고 했다. 그는 "제가 현실을 이해 못해서 자꾸 비현실적 요소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는 거 같다"며 "예컨대 '신체에 불편이 생기면 병원을 찾아가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산부인과에 가는 건 유독 부끄러운 일로 취급 받지?' 하는 물음 같은 게 저를 글을 쓰게 한다"고 말했다.정 작가가 생각하는 <저주토끼>는 "쓸쓸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그는 "세상은 원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고, 힘들거나 외로운 사람에게 '네 선택이 달랐다면 결과도 바뀌었을 거야'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며 "그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제각기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오는 7일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숏리스트의 발표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롱리스트 발표 시간과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한국 시간 7일 오후 5시(영국 시간 오전 9시)께 발표될 가능성이 높다. 최종 수상작 발표일은 5월 26일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