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졸지에 하반신 마비…"많은 돈 받아내야겠습니다" [김수현의 보험떠먹기]

'12대 중과실' 교통사고 발생 사례
형사처벌 대상…합의서 여부 중요

형사합의금·민사보상금 지급 가능
합의서 내 형사상 목적 적시 필요
보험금 청구권 양도 보험사 통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고1 딸과 군 복무 중인 20대 아들을 둔 50대 박모씨. 평화롭던 박씨의 일상을 뒤흔드는 불행이 찾아온 건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한 날부터였습니다. 박씨는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퇴근하는 길에 번쩍이는 전조등을 보고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박씨가 신호를 위반해 달리던 한 외제차 운전자에 그대로 치였습니다.

박씨의 상태는 심각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척수 손상으로 하반신 운동 및 감각 기능이 마비됐다는 게 의료진 진단이었습니다. 박씨는 이 사고로 회사를 그만둬야 했고,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게 됐습니다. 아내와 딸아이가 자신을 간호하다 간이침대서 쪽잠을 자는 모습에, 제대 후 바로 돈을 벌어 가장 노릇을 하겠다는 아들까지. 박씨는 매일 밤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습니다.박씨의 고민이 더욱더 깊어진 건 30대 언저리로 보이던 사고 가해자가 합의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시점부터였습니다. 박씨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며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가해자의 모습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의 고함을 지르며 그를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박씨는 충분한 합의금을 받아 아이들 손에 쥐여줄 수 있는 것이 가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합의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박씨는 또다시 실망하고는 말았습니다. 교통사고 가해자로부터 형사합의금을 받는 경우 손해배상금을 받기 어려워진다는 한 또다른 피해자의 글 때문이었습니다. 형사합의금과 손해배상금을 모두 받는 것이 불가한 일인지,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이 자신에게 더 유리한 선택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교통사고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는 보상 외 합의의 목적으로 이뤄지는 금전적 지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크게 형사합의금과 손해배상금으로 나뉩니다. 형사합의금은 민사상 손해배상금에 대한 합의금 외에 형사처벌의 감면을 목적으로 한 별도의 합의금을 의미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형사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확인서를 경찰서에 제출하는 대가로서 받는 금액을 뜻하죠. 형사합의금의 경우 모든 자동차 사고에서 발생하는 사안은 아닙니다.

자동차 운전자가 타인을 다치게 한 경우 원칙적으론 형법상 '업무상 과실치상죄'에 해당합니다.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제3조에 따르면 가해자는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습니다. 단, 피해자가 형사처벌을 원하지 않거나 가해자가 자동차종합보험에 가입한 경우 형사처벌이 면제됩니다. 자동차종합보험을 들지 않았다면 피해자가 가해자의 형사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확인서를 경찰서에 제출해야 형사처벌이 면제될 수 있습니다.자동차종합보험에 가입했더라도 형사처벌 면제가 불가한 경우는 있습니다. 가해자가 12대 중과실 또는 뺑소니를 저지르거나 음주측정에 불응한 경우입니다. 12대 중과실은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 과속, 무면허 운전, 음주운전, 횡단보도, 앞지르기 방법 위반, 보도 침범, 철길건널목 통과 방법 위반, 승객추락 방지의무 위반, 어린이보호구역, 화물낙하 방지 위반을 의미합니다. 박씨의 사례는 가해자의 신호위반으로 발생한 사고로 12대 중과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엔 피해자가 형사처벌을 원하지 않거나 가해자가 자동차종합보험을 가입했더라도 형사처벌 대상이 됩니다. 만약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도 형사처벌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피해자가 중상해를 입은 경우엔 가해자가 자동차종합보험을 가입했더라도 형사처벌 대상이지만, 피해자가 형사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형사처벌이 면제됩니다. 중상해 경우를 제외한 예외 사항에서는 피해자가 형사처벌을 원하지 않아도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형사합의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단 형사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피해자의 탄원서가 제출된 경우 가해자에 유리한 사정으로 참작될 수 있습니다. 형사처벌 면제는 불가하나 처벌 감경받고자 하는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에 형사합의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통상 형사합의금은 자동차종합보험에서 지급되는 민사상 손해배상금과는 별도의 금액으로 지급합니다. 그러나 종종 피해자가 추후 받게 되는 민사보상금이나 법원의 민사소송 판결액에서 형사합의금 전액 또는 일부가 공제되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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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합의금이 이후 법원에서 민사상 손해배상금의 일부로 판단될 여지가 남을 수 있단 의미입니다. 이는 판례를 통해 증명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대법원 1988년 5월 24일 선고 87다카3133 판결에는 "불법행위의 가해자에 대한 수사 과정이나 형사재판과정에서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합의금 명목의 금원을 받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합의를 한 경우, 합의 당시 받은 금원을 위자료 명목으로 지급받는 것임을 명시하였다는 등의 사정이 없는 한 그 금원은 손해배상금의 일부로 지급되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따라서 형사합의금이 보험회사의 민사보상금에서 공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다면, 형사합의서에 특정 문구를 삽입하거나 채권양도 사실을 가해자가 보험회사에 통지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합니다. 먼저 형사합의서에 금액의 목적이 형사상 합의를 위한 것에 있으며, 민사상의 손해배상금과 관련 없는 금원이란 점을 분명히 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경우 형사합의금이 손해배상금이 아닌 형사상 위자료 명목으로 받은 것이란 점을 명시함으로써 보험회사에서 민사상 손해배상액을 산정할 때 공제되지 않도록 합니다. 단, 법원에서는 경우에 따라 민사상 손해배상금 중 위자료 산정 시 참작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히 형사합의금과 민사상 손해배상액을 구분 짓는 방법은 보험금 청구권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을 형사합의서에 삽입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형사합의금의 목적이 민사상 손해배상금과 무관하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채권양도 사실을 가해자가 보험회사에 통지해야 합니다. 이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의 보험금 청구권을 양수받았기에 위자료 감소액까지 피해자가 보험회사에 청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법원에서도 형사합의금을 보험회사의 민사보상금에서 공제하지 않게 됩니다.보험업계 관계자는 "가해자가 채권양도 사실을 통지하는 경우가 피해자에게는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다만 채권양도 방식은 가해자가 자동차종합보험에 가입된 경우에만 이뤄질 수 있다"며 "가해자가 종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경우 피해자의 무보험차상해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므로 채권양도 방식 자체가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형사합의금 조정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위 내용은 특정 사례에 따른 것으로, 실제 민원에 대한 보험사의 보험금 지급 여부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