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죽음의 집', 죽은 자와 죽지 않은 자…관객에게 던지는 삶의 의미

4인의 "뭘 위해 사는가" 토론
관객들도 쉽게 답하지 못해
무대 色·명암으로 감정 표현 눈길
극단 ‘아어’ 제공
모든 생명은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건 인간뿐이다. 죽음 앞에 섰을 때 인간은 비로소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연극 ‘죽음의 집’(사진)은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주장한 ‘현(現)존재’를 보여준다. 현존재는 죽음이라는 시간의 한계를 깨닫고 삶을 책임감 있게 살려고 노력하는 존재다. 극은 ‘죽은 자’와 ‘아직 죽지 않은 자’의 대화를 통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관객 스스로 성찰하도록 돕는다.죽음의 집은 ‘연극계의 시인’으로 불리는 고(故) 윤영선 한국예술종합대 교수의 미발표 희곡이다. 아들인 윤성호 극작가 겸 연출가가 그의 초고를 유품인 USB에서 발견한 뒤 마저 완성해 무대에 올렸다. 2020년 제41회 서울연극제에서 연출상과 희곡상을 받은 화제작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가을 밤 11시52분. 상호(이강욱 분)의 집에 상호와 그의 친구 동욱(이형훈 분), 영권(심완준 분), 영권의 아내 문실(문현정 분) 등 네 명이 모인다. 이 중 동욱을 제외한 세 명은 모두 본인이 죽었다고 주장한다.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대화할 수 있는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동욱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 망자(亡者)들은 동욱에게 본인의 죽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자연스레 죽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사유가 시작된다.

네 사람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은 곧 ‘사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동욱에게 묻는다. “왜 사세요?” “뭘 위해 사세요?” 동욱은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이를 지켜보는 관객도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극은 죽음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인간의 실존을 그렸다. 그리고 그 자각 전까지는 다들 죽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을 관객에게 던진다.무대는 단순하다. 흰색 벽과 흰색 바닥, 그 위에 최소화한 소품은 조명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11시52분에 멈춘 상호 집의 명암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노랗다 못해 붉은 색에 가까운 강한 조명이 이강욱 배우의 괴로운 표정에 집중될 때 관객은 죽음 앞에 처음 선 상호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베란다 창문이 중요한 무대 장치다. 집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만드는 창은 곧 삶과 죽음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망자가 문밖을 나서고, 창문 바깥에 서서 관객을 바라보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된다. 곧바로 관객석의 조명이 켜지며 관객은 창에 비친 스스로를 응시하게 된다. 죽음을 인식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묻게 된 현존재가 앉아 있다. 극이 끝나고 한동안 객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공연은 이달 24일까지.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