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우의 Fin토크] 제로페이와 핀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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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우 금융부 기자한동안 잊고 지냈던 제로페이에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두 달 전이다. 세간의 관심이 대통령 선거에 쏠려 있던 올해 초, 핀테크업계에선 또 다른 선거전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300여 개 핀테크 기업을 회원사로 둔 한국핀테크산업협회의 회장 선거다. 핀테크 위상이 높아지면서 여러 최고경영자(CEO)가 출사표를 던졌다. 제로페이 운영을 전담하는 한국간편결제진흥원의 수장이 당선됐다.
개인적으로 의외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 협회 역대 회장의 면면을 보면 이승건 토스 대표와 류영준 전 카카오페이 대표처럼 ‘테크 기업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었다. 냉정히 말해 제로페이가 그런 서비스는 아니다는 평이 많다. 4년 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제로페이 행사에 참석해야 했던 핀테크 CEO들이 털어놓던 하소연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직접 투표권을 행사한 회원사 관계자들과 얘기하면서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핀테크에 대한 신임 회장의 지식과 애정이 크고, 업계와 협회를 두루 거치며 경륜을 쌓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개인의 경쟁력을 인정받은 선거였다는 것이다. 전자금융법 개정을 비롯해 규제 현안이 많은 핀테크업계로선 그의 대관(對官) 역량에도 기대를 걸고 있었다.
'官製' 오명 못 벗은 제로페이
제로페이 홈페이지 첫 화면에는 그간의 이용 실적이 공개돼 있다. 137만8501개 가맹점에서 3조5092억4500만원어치 결제가 이뤄졌고, 이를 통해 소상공인이 아낀 수수료는 289억2000만원이라고 한다. 첫 1년 동안 가맹점이 30만 개, 결제액은 700억원 남짓이었음을 감안하면 고무적 성과처럼 보인다.그런데도 왜 제로페이에는 ‘관제(官製) 페이’ ‘박원순 페이’라는 수식어가 여전히 따라다닐까. 관료들이 세금을 투입해 ‘멱살 잡고 하드캐리’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성과라는 점이 팩트로 입증됐기 때문일 것이다. 제로페이는 지역상품권을 10% 싸게 팔기 시작하며 상승세를 탔는데, 그 할인액은 시비와 국비로 메꿔줬다. 이렇게 팔린 상품권은 식당 같은 영세 골목상권보다 학원비 납부에 더 많이 쓰였다는 통계가 있다. 서울시 공무원은 제로페이 가맹점을 늘리는 데 동원됐고, 업무추진비는 제로페이로만 쓰라는 지시도 받았다. 제로페이가 널리 보급되면 다양한 민간 핀테크 기업이 활용하는 ‘금융 인프라’ 역할을 할 것이라던 출범 당시 청사진은 아직 먼 얘기다.'민간페이'의 치열함 이길 수 있나
시장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제로페이가 등장할 즈음 택시 호출, 부동산 매물 정보, 숙박 예약 등의 분야에서 공공성을 강조한 앱들이 유행처럼 쏟아졌다. 택시단체와 노조가 보급한 ‘티원 택시’, 한국공인중개사협회가 만든 ‘한방’, 대한숙박업중앙회의 ‘이야’ 같은 것들이다. 하나같이 민간 기업의 ‘수수료 폭리’에 맞선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끝내 자생력을 기르지 못했다.간편결제 시장은 삼성페이,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등 몇몇 선발주자가 선점한 지 오래다. 언뜻 보면 경쟁 구도가 절대 바뀌지 않을 철옹성 같다. 하지만 내부적으론 피 말리는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CEO가 나란히 교체된 네이버페이와 카카오페이는 대대적인 외형 경쟁을 예고했다. 신원근 카카오페이 대표가 “올해 결제액 선두 자리에 오르겠다”고 도발하자 박상진 네이버파이낸셜 대표는 “더욱 압도적인 1위를 굳히겠다”고 응수했다.자신만의 강점을 살려 틈새 수요를 파고드는 후발주자들의 도전도 매섭다. 쿠팡페이는 결제 과정을 초단순화해 쿠팡의 구매율과 충성도를 높이는 도구로 쏠쏠하게 활용되고 있다. 최근 후불결제 기능을 추가한 데 이어 조만간 대출사업에도 뛰어들어 덩치를 키울 예정이다.
‘국민 중고장터’로 자리 잡은 당근마켓도 핀테크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중고물품을 거래할 때 낯선 사람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주거나 현금을 건넬 필요 없이 채팅창에서 바로 송금하는 당근페이를 출시했다. 온·오프라인 가맹점을 늘려 결제사업까지 키운다는 구상이다. 무엇을 내놓으면 잘 먹혀들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런 모습을 ‘관제 페이’에선 본 기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