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운용위 설치 의무화..."적립금 부족하면 노조 검증 받아야"

오는 14일부터 확정급여형 퇴직연금제도(DB형 제도, Defined Benefit)를 도입한 300인 이상 사업장은 퇴직연금 적립금에 대해 별도의 전문 운용위원회(IPS)를 설치하고 매년 적립금 '운용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정부가 적극 개입해 퇴직연금 운용 수익률을 높여 근로자의 퇴직급여 수급권을 보장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고용노동부가 최소 적립금을 충족하지 못한 기업은 운용위에 근로자 대표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는 조항을 들여 논란이 되고 있다.

고용부는 12일 국무회의에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 심의·의결했다고 밝혔다. 시행령안에 따르면 적립금운용위원회는 퇴직연금담당 임원을 위원장으로 하고 5~7명 이내 위원으로 구성된다. 회사는 적립금운용계획서를 작성하고, 적립금 운용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에 근거해 적립금을 운용해야 한다. DB형 제도는 사용자가 향후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사외에 적립하고, 사용자가 운용해서 근로자에게 퇴직급여를 지급하는 제도다.

운용위에서 만드는 적립금운용계획서는 Δ적립금운용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사항 Δ퇴직적립금 운용 범위 Δ목표수익률 Δ예금이나 주식·채권 등 투자상품, 대체투자 등 다양한 자산에 대한 배분정책 Δ운용성과 평가와 적립금운용담당자의 의무와 책임 등 적립금 운용의 관리에 관한 사항을 담아야 한다.

운용위와 적립금 운영계획서는 그간 기업들이 과도하게 '원리금 보장형'에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기업이 보다 적극적인 퇴직금 운용을 하도록 독려하는 방안이다.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을 운용한 기업의 95.5%가 '원리금 보장'방식으로 운영 중이라 연금수익률이 1.91%에 그쳐 물가상승률도 따라 잡지 못한다는 비판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시행령안이 정한 적립금 운용위 구성 방식이 논란이 되고 있다. 운용위원 구성은 원칙적으로 회사의 재량에 달려있다. 다만 법정 최소적립금(95%)을 충족하지 못한 기업은 '근로자 대표'를 운용위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기업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근로자대표'는 근로자 과반수로 이루진 노조가 있다면 노조에서 선출된 사람, 그게 아니라면 근로자 과반수가 선출한 대표로 규정하고 있다.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라면 사실상 노조위원장이나 노조 간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업들은 "과잉규제"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한 은행 관계자는 "CFO 등 재정 담당 임원들은 노조와 교류해본 적이 없어 노조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며 "전문 지식이 없는 근로자대표가 적립금 운용과정에서 어떤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노사관계가 좋지 않은 사업장에서는 재정상황을 들여다 보고 협상 수단으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노사관계가 좋지 않거나 강성노조가 있는 기업은 갈등이 증폭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중규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적립금 부족에 대해서는 기업에 과태료는 물론 재정안정화계획서도 작성할 의무가 부과되는데, 근로자 대표를 운용위에까지 들이는 것은 과도하다는 주장이다.

한국경제신문이 입수한 고용부 규제영향분석서에 따르면 DB를 운영 중인 300인 이상 기업은 1171개며, 이 중 최소적립 비율을 미준수한 기업은 409개다. 이들이 모두 운용위에 근로자 대표를 들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고용부 규제영향분석서 조차도 "퇴직연금 수급에 불안함이 없는 경우에도 근로자 대표를 참여시키는 것은 사용자에 대한 과잉규제로 비칠 우려가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 파급효과가 예상됨에도 고용부는 제도 설계 파트너인 금융권에 보안 유지를 신신당부하는 등 공론화를 막는데 급급해 빈축을 사고 있다.실제로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비하는 기업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이번 시행령 실시로 기업들의 부담은 커질 전망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위원회 구성 및 운용계획서는 전문적이라, 이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기업들의 관련 컨설팅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