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하는 게 예정된 사업' 탈출 러시…"하루하루가 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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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탈원전 대재앙'에 허우적대는 원전 업계“탈원전 정책 시행 이후 일감이 뚝 끊겼습니다. ‘미래가 없다’면서 직원들은 나갔고, 은행거래마저 힘들어졌습니다.”
'5년 데스밸리'가 생태계 부활 가로막고 있다
15일 만난 경남 창원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부품업체 영진테크윈의 강성현 대표는 여전히 ‘탈원전 쓰나미’의 한 가운데 있었다. 원전 제어봉 구동장치에 들어가는 부품을 0.1㎜ 단위로 정밀하게 깎아내던 기계는 1년 넘게 멈춰 있다. 작업으로 한창 시끄러워야 하는 공장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2003년 원전 부품 제조업을 시작한 영진테크윈은 지난달 처음으로 공장 가동률 0%를 찍었다. 그동안은 기존 신고리 5·6호기에 들어가는 잔여 일감으로 버텼지만 이젠 그마저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혹여 녹이 슬까 멈춰 선 설비에 기름칠만 반복하는 강성현 대표의 어깨가 유독 무거워 보였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탈원전 정책 폐기를 공식화했지만 원전 생태계의 근간을 이루는 뿌리 업체들에 ‘부활’은 먼 얘기일 뿐이었다.영진테크윈, 삼부정밀, 인터뱅크, 세라정공, 응강산업…. 한국경제신문이 원전산업 부활 가능성을 점치기 위해 접촉했던 원전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생존을 위한 사투에 급급한 처지였다. 매년 2억원씩 빚을 내 버틴다는 영진테크윈은 70억원을 들여 구매했던 컴퓨터수치제어(CNC) 연삭기 등 20여개 장비를 은행에 담보로 잡혔다. 1억9000만원에 샀던 선반을 8000만원에 처분해 직원 월급을 주기도 했다. 원전용 자동 연료공급장치 제조업체 삼부정밀의 최재형 대표는 “설비투자용으로 25억원을 대출받은 은행에서 매일 대출 상환 독촉 전화만 받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원전 산업의 뿌리 역할을 하는 중소기업들은 재생을 장담하기 힘든 상태다. 많은 경우 원전 매출이 ‘제로(0)’로 떨어진 탓에 이미 문을 닫았거나 기초체력이 극도로 약해졌다.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가 있는 창원을 중심으로 2018년 353개에 달했던 경남 지역 원전업체는 270여개로 줄었다. 살아남은 업체도 경쟁력을 자신할 수 없다. 원전 제어봉 제어계통 전력함(퓨즈 및 차단기) 제조사 인터뱅크의 문찬수 대표는 “10년 넘게 근무한 고숙련 근로자들이 대부분 그만둔 탓에 다시 일감이 늘어도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원자력 공급산업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26.3%(매출 1조673억원)에 이른다.(2020년 원자력산업 실태조사) 이들 뿌리 업체들의 부활 없이 원전산업의 재건을 논할 수 없다. 하지만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더라도 중소 업체까지 온기가 퍼지기엔 걸림돌이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감이 생기기까지의 공백(데스밸리)을 줄이는 게 급선무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력정책센터장은 “3~5년은 지나야 작은 설비를 맡은 중소기업에 일감이 갈 것”이라며 “서둘러 구체적인 원전 부활 프로젝트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바닥난 자금…은행 대출로 연명
윤석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지난 12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탈원전 정책 폐기를 공식화했다. 하지만 원전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원전 제조업체들에 아직 봄은 찾아오지 않았다. 원전 르네상스를 이끌 구체적인 청사진이 없는 것은 물론, 당장 원전 건설이 재개되더라도 실제 말단 부품 제조 현장까지 일감이 떨어지려면 3~5년은 걸릴 전망이기 때문이다.원전 하나를 건설하려면 100만개가 넘는 부품이 필요하다. 각 부품을 제조하는 수백 개의 중소기업들은 오랜 세월 유기적으로 얽혀 공급망을 구성해왔다. 한두 개의 업체만 쓰러져도 전체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구조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기는 여간 험난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원전 산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원전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초 원자로 등 원전 주기기를 만드는 국내 유일 기업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는 협력회사들을 상대로 실태조사에 나섰다. 자금 상황과 인원 변동 여부, 신한울 3·4호기 원전공사 재개시 부품 제작 가능성 등을 타진했다. 조사에 응한 원전 중소기업들은 자금 지원이 시급하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2017년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 이후 협력사 매출은 급감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협력사들과 맺은 원전 부품 납품 계약은 2016년 2836건에서 2019년 1105건으로 줄었다.
원전 중소기업들은 급감한 원전 부품 매출을 대체하기 위해서 일반산업기계나 제철설비제조 등으로 사업을 전환하거나 선박기자재 같은 신사업을 찾아봤지만 여의찮은 상황이다. 최근 원자잿값 폭등은 경영난을 가중했다. 최재형 삼부정밀 대표는 “정부의 정책이 바뀌면서 매출의 80%를 차지하던 원전 일감이 한꺼번에 사라져 현재는 완전 제로(0)상태”라고 전했다.당장 원전 부품 제작 의뢰를 받는다고 가정해도 원전 생태계 말단까지 피가 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제작에서 대금결제까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여의 세월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 기간 원자재를 사고, 직원 고용을 유지하며, 사업체를 운영하는 자금이 필요한데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체력이 바닥나있다. 문찬수 인터뱅크 대표는 “두산중공업에 납품하던 원전 설비 매출은 모두 날아갔고 기계 부품 설비업으로 버티지만, 작년 매출은 2017년의 절반 수준인 10억원 안팎에 불과하다”며 “은행 대출 등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원전 핵심 부품 20여 종을 두산에너빌리티에 단독 납품했던 세라정공도 해양플랜트 설비 등 다른 일로 메꿔서 연명했지만 2018년부터 적자 전환한 이후 매년 적자 폭이 커지고 있다.
○떠나버린 30·40대 고숙련 인력
원전 부품 제조를 믿고 맡길 기술자들이 오래전에 현장을 떠난 것도 심각한 문제다. 원자력산업협회에 따르면 원자력산업체 인력은 2016년 2만2355명에서 2020년 1만9019명으로 3336명(15%) 감소했다. 제조 현장에서 10년 이상 노하우를 쌓은 30·40대 고숙련 기술자들이 일감이 사라진 원전 부품 제조업계를 떠나 자동차·조선·중공업 등 다른 업종으로 넘어갔다. 강성현 대표는 “사람이 정말 중요한 업종인데 10년 이상 경력자들이 많이 그만뒀다”며 “15명까지 있던 직원이 지금은 7명 수준으로 반토막”이라고 했다.신입 직원들을 뽑아서 교육하는 것도 한계를 맞이했다. 탈원전 정책 시행으로 ‘망하는 게 예정된 사업’이란 인식이 퍼진 탓에 젊은 층은 원전 업계에 발을 들이길 망설이고 있다. 최재형 대표는 “2017년에 사업을 의욕적으로 해보려고 젊은 신입직원들을 뽑았지만 원전 산업의 미래가 어렵다고 보고 모두 1~2년 만에 나가버린 상황”이라고 전했다.
○“앞으로 5년이 고비…청사진 나와야”
원전 하나가 건설되는 데에는 최소 1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경북 울진에 부지만 마련하고 2017년 공사가 중단된 신한울 3·4호기만 하더라도 2002년 5월 처음 예정 구역으로 지정된 후 20년 넘게 완공되지 못한 상태다. 신한울 3·4호기 공사를 재개하려 해도 다시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관측이 나오는 만큼 공사 기간은 더욱 길어질 전망이다. 원전 중소기업인들은 실제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일감이 나올 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만큼, 새 정부가 구체적인 청사진을 이른 시일 내에 내놓고 적극적으로 금융지원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8년부터 적자를 보고 있다는 김곤재 세라정공 대표는 “지난 5년간 정권이 바뀌면 정책에 변화가 생길 것이란 기대 하나로 빚을 내면서 버텨왔다”며 “윤석열 정부가 원전 생태계를 하루빨리 복원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익명을 요청한 또 다른 발전설비업체 대표는 “지금부터 뭔가를 하려고 해도 최소 3~4년은 걸릴 것 같다”며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희망 고문을 받는 상황이라 특단의 대책이 서둘러 나오길 기대한다”고 했다. 원자력산업협회 관계자는 “중소기업 지원사업이 작년부터 시행되고는 있지만 건당 4000만~1억원 수준으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며 “전문인력 채용을 위한 자금지원을 확대하고 소형모듈 원자로(SMR) 등 정부 차원의 미래 먹거리 청사진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김진원/김병근/창원=김해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