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소련'에서 지워진 연쇄살인마…영화 '쓰리'

고려인 4세 박루슬란 감독 "한·카자흐 합작…현지서 좋은 반응"
유영철이나 이춘재 같은 잔악한 살인범들의 사건을 우리 정부가 나서 묻어버렸다고 가정해보자. 사건을 수사한 형사들의 입을 막기 위해 해임까지 하고, 살인범은 사형장이나 교도소 대신 정신병원으로 간다면 유가족과 국민들은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이런 일이 1970년대 후반 소비에트연방(소련) 시절 카자흐스탄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8명이 처참하게 희생된 연쇄살인 사건은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 여론을 의식한 정부에 의해 묻혔다.

고려인 4세인 박루슬란 감독은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통해 40여 년간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던 이 사건을 들췄다. 구소련 우즈베키스탄 출신인 그는 어릴 적 들었던 연쇄살인범 이야기를 떠올린 뒤 실제 범인을 검거한 형사를 취재해 시나리오를 썼다.

로카르노영화제 신인 경쟁 부문에 진출한 '하나안' 이후 10여 년 만의 작품이다.

그는 최근 언론 시사회를 겸한 기자간담회에서 "선생님께서 수업이 끝나면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며 "범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에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고 기획 배경을 밝혔다.
영화는 신참 형사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 분)의 시선을 따라 흘러간다.

존경받는 베테랑 형사 스네기레프(이고르 사보치킨)의 팀에 들어간 그는 수습 딱지를 떼기도 전에 여러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연쇄살인 사건을 맡는다.

범인은 셰르를 키우다시피 한 누나 다나(사말 예슬라모바)에게도 접근한다. 셰르와 스네기레프 덕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어느 날 밤 집을 나선 다나가 실종되면서 셰르의 두려움과 죄책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결국 폭주를 멈추지 못한 범인은 이웃들 앞에서 대놓고 살인 행각을 벌이면서 덜미가 잡힌다.

그러나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담당 형사들을 일터에서 쫓아낸다.

셰르의 동료는 "위대한 소련에는 연쇄살인마가 있을 수 없다"며 자조한다.

초반부 범인이 누구일지를 두고 생긴 궁금증은 다나의 행방으로, 범인이 연쇄살인을 벌인 이유로 옮겨간다.

그리고 마지막은 '정부는 왜 이렇게까지 사건을 숨기려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끝난다.

스토리가 촘촘하다고 보기 어렵고 널뛰는 느낌도 있지만, 끝까지 관객의 호기심을 유발한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앞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고려인 감독 영화로는 최초로 뉴 커런츠 상을 받으며 호평을 들었다.
카자흐스탄 배경에 배우들도 카자흐스탄인이나 러시아인이지만 한국 영화의 색채가 나는 이유는 주요 제작 스태프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지난달 카자흐스탄에서 먼저 개봉했다.

박 감독은 "카자흐스탄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해 현지에서 개봉한 사례가 없었다.

완벽한 합작 영화라 생각한다"며 "호불호는 물론 갈리지만, 극장을 아예 찾지 않던 사람들도 보러 오는 등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으로 귀화한 박 감독은 2000년 어학연수 차 한국에 왔고 6년 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그는 한국에 처음 왔던 당시 "완전히 신세계를 봤다"면서 "젊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직업을 선택하고 다양한 인생을 사는 모습을 보며 영화감독이라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21일 개봉. 상영시간 101분. 15세 관람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