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서 검증된 '위기관리 베테랑'…저공비행하는 보잉 다시 띄울까

글로벌 CEO - 데이비드 칼훈 보잉 CEO

CEO 임기 첫 해부터 난관
여객기 추락사고 '소방관' 역할
1년 만에 원인 밝히고 운항재개
3만명 감원으로 코로나도 극복

하늘길 열렸지만 악재 겹쳐
132명 탑승 中 보잉 여객기 추락
중국 항공사에 납품 차질 불가피

업계 '위기관리 전문가'로 정평
“새 최고경영자(CEO)의 할 일이 산적해 있다. 미국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 될 것이다.”

2020년 1월, 미국 항공기 제조사 보잉을 이끌 신임 CEO를 두고 시장에선 이런 말이 나왔다. 연쇄 추락 사고로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 구원투수로 투입된 데이비드 칼훈 CEO의 과제였다.이로부터 약 2년 후 보잉은 또 다른 악재에 직면했다. 132명이 탑승한 보잉 737-800 기종의 중국 동방항공 여객기가 추락하면서다. 칼훈이 보잉을 둘러싼 난기류를 헤쳐나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임기 첫해부터 난관

칼훈은 ‘경영부터 엔지니어링까지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는 임무를 안고 보잉 조종석에 앉았다. 당시 보잉은 최대 경쟁사인 유럽의 에어버스에 1위 자리를 내줬다. 2018~2019년 추락 사고가 원인이었다. 보잉 인기 기종 737맥스가 두 차례 추락하면서 346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잇단 참사로 데니스 뮬런버그 전 CEO는 불명예 퇴진했다.칼훈이 후임 CEO로 지목된 2019년 12월 23일 보잉 주가는 3% 상승했다. ‘칼훈이 보잉을 수렁에서 꺼낼 적임자’라는 평가가 많았다. 칼훈은 2009년부터 보잉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10년 넘게 경영활동에 관여해온 만큼 보잉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빠르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나왔다. 하지만 737맥스가 개발될 당시 칼훈이 이사회 멤버였다는 점에서 그 역시 사고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737맥스의 추락 원인은 비행 제어 역할을 하는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밝혀졌다.

2020년 1월 칼훈은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임기를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혔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다. 칼훈의 임기 첫해 보잉은 64억달러(약 7조784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1년 전 60억달러의 영업이익에서 적자로 돌아섰다. 그는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조기 은퇴, 강제 해고 등을 통해 직원 3만 명을 줄였다. 보잉 직원은 16만 명에 달한다. 칼훈은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내면서도 단호히 결정을 내렸다.

배당금 지급과 자사주 매입도 중단했다. 그는 “보잉이 주주들에게 현금을 퍼붓는 시대는 지났다”며 “현금을 창출하면 사업에 투자하고 부채를 상환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급여도 자발적으로 삭감했다. 2020년 그에게 지급된 현금 140만달러 중 20%가량인 26만9231달러만 가져갔다. 다만 주식을 포함한 수령액은 2100만달러가 넘는다.그는 1년도 안 돼 보잉의 최대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사고 기종 737맥스의 운항을 재개하는 일이었다. 칼훈이 회사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유지하고 있는 배경이다. 칼훈이 64세이던 지난해 4월 보잉은 그의 정년을 65세에서 70세로 높였다. 칼훈이 CEO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이다. 보잉 이사회는 “칼훈은 737맥스 운항을 재개하고 코로나19 대유행으로부터 회사를 회복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보잉의 영업손실은 34억달러로 전년 대비 50% 가까이 줄었다.

“결단력 있는 리더”

전임 CEO와 달리 칼훈은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다. 그는 버지니아공과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첫 직장은 보잉 최대 엔진 공급업체 제너럴일렉트릭(GE)이다. 부회장까지 지낸 그는 26년간 다닌 회사를 나와 2006년 시장조사업체 닐슨으로 옮겼다.

칼훈은 닐슨을 상장사로 일궈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에선 포트폴리오 운용을 담당하며 다방면에서 재능을 갖췄다는 평을 얻었다.특히 그는 ‘위기관리 전문가’로 업계에서 정평이 나 있다. 제프리 이멜트 GE 전 CEO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9·11 테러 이후 어려워진 GE 항공사업을 맡았던 모습을 보면 칼훈은 높은 압박 속에서도 업무를 잘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칼훈은 수십 년 동안 GE 닐슨 블랙스톤 등에서 임원으로 일하면서 기업 회생 전문가로 환영받았다”며 “동료들은 그를 경험이 많고 결단력 있는 사람으로 묘사한다”고 전했다.

늘어나는 여행 수요 속에서 보잉은 다시 날아오를 듯했지만 또 한 번 악재와 마주했다. 지난달 21일 보잉 기종의 동방항공 여객기가 중국 남부 산악지대에 추락했다. 탑승자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블랙박스가 발견되면서 사고 원인 규명에는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NYT는 “이번 사고가 보잉 중국 사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보잉은 737맥스 추락 사고 여파로 중국에서 사업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보잉이 중국 항공사에 납품한 비행기 수는 12대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에어버스는 140대 이상을 판매했다.칼훈은 이번 사고 후 직원들에게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안전과 투명성에 대한 약속을 바탕으로 고객사와 사고 조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칼훈은 그가 12년 전 집필한 책 《기업이 승리하는 방법》에서 ‘솔직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앞선 두 차례 사고가 발생했을 때 보잉 경영진에게선 볼 수 없었던 태도라고 로이터통신은 평가했다. 칼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번 사고 후에도 유지될지는 오로지 그의 손에 달려 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