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팅 뒤땅'에 좌절했지만…공은 10m 굴러 홀 30cm 옆에 붙었다 [조희찬 기자의 오거스타 도전기]

(2) 유리알 그린, 양탄자 페어웨이

야심찬 첫 샷, 솔잎 위 러프로
미끄러워 다리 고정 안돼
‘슬쩍 빼놓고 칠까’ 생각했지만
캐디 월터 “점수 신경쓰지 말라”
조희찬 기자가 3번홀에서 퍼터로 어프로치 샷을 하는 ‘텍사스 웨지’를 시도하고 있다.
20년 전 처음 미국 오거스타내셔널GC 티박스에 오른 최경주 선수의 소감은 “‘천국에 골프장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겠구나’ 싶었다”였단다. “골프를 못 치면 골프장의 경치를 즐길 권리도 없다”고 했던가. 그때(11일 오전 11시·현지시간) 드라이버를 쥔 채 페어웨이를 노려보고 있는 기자의 머릿속은 ‘오른쪽 벙커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왼쪽으로 몸을 더 틀었던 것 같다. 스윙 리듬도 평소보다 빨랐고. 아니나 다를까. 깎여 맞은 공이 벙커 방향으로 휘더니 나무숲 사이로 사라졌다. 공을 찾으러 가는 길에 만난 잔디는 양탄자처럼 푹신했다. ‘오거스타 루키’의 첫 티샷은 미스샷이었지만, 단숨에 공을 찾아준 베테랑 캐디 월터 덕분에 세컨드 샷을 칠 수 있었다.

양탄자 페어웨이와 솔잎 러프

티샷이 떨어진 곳은 1번홀(파4·365야드, 333m)과 프레스빌딩 사이에 있는 ‘B러프’(세컨드 컷 러프). 길게 자란 풀로 만든 ‘A러프’(퍼스트 컷 러프)를 지나 누런 솔잎 사이로 흰색 타이틀리스트 공이 보였다. 오거스타GC는 ‘골퍼들의 혼을 쏙 빼놓을 최상의 B러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컨테이너 10대 분량의 솔잎을 구입해 깐다고 한다.

수백 번 라운드를 나간 11년 구력의 골퍼지만, ‘솔잎 샷’은 처음이었다. “미끄러운 솔잎 탓에 다리를 고정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솔잎이 만든 빈 공간 위에 떠 있는 공을 정확히 맞힐 확률은 몇 %나 될까. 임성재 선수가 얘기한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페널티가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란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불현듯 한국 주말골퍼처럼 ‘공을 A러프로 꺼내놓고 쳐도 될까’란 생각이 떠올랐다. 월터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월터에게 ‘빼놓고 쳐도 되지?’란 표정을 지었나 보다. 월터는 웃으며 “스코어에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오거스타를 즐겨”라며 7번 아이언을 건넸다.
조희찬 기자(왼쪽부터), 윌 그레이브스 AP통신 기자, 마틴 립튼 더선 기자, 그렉 셰이머스 게티이미지 사진기자가 1번홀 티박스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나쁜 짓을 하려다가 선생님에게 들킨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 못 친다고 벌 받는 것도 아닌데 스코어 관리할 필요가 뭐가 있나. PGA 룰대로 쳐보자.’

7번 아이언으로 간결하게 끊어쳤다. 낮은 각도로 130야드 정도 날아간 공은 벙커를 넘어 페어웨이 한가운데 떨어졌다. 페어웨이 잔디는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빽빽했고,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랬다. 국내 대회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국 최고라는 골프장을 수없이 거닐었지만, 이 정도로 촘촘하게 잔디를 심은 곳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홀까지 남은 거리 40m. 세 번째 샷은 56도 웨지로 충분했다. 10㎝짜리 ‘초대형 디봇’을 남기고 날아간 공은 홀 왼쪽 11야드 거리에 딱 떨어졌다. 동반자 중 유일한 '3온'. 파 찬스였다.

그린 스피드 4.5m…이게 실화냐

“유리알 그린을 ‘마스터’하지 못하면 마스터스 대회를 가질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 오거스타GC의 그린에 서면 무슨 얘기인지 감이 온다. 그야말로 유리판 위에서 퍼팅하는 느낌이다.

올해 마스터스 대회에서 만난 호주동포 이민우는 "체감상 그린 스피드가 15피트(4.5m) 이상인 것 같다"고 했다. 한국 골프장의 그린 스피드는 대개 2.5m 안팎. 마스터스 그린을 놓고 “왁스칠한 자동차 보닛”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타이거 우즈가 1995년 마스터스 대회 첫 출전을 앞두고 왜 미끈한 농구장 바닥에서 퍼팅 연습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조희찬 기자가 3번홀 우측 러프에서 셋업 자세를 취한 모습.
오거스타GC가 ‘빠른 그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공기순환장치에 있다. 18개 그린마다 공기순환장치를 바닥에 설치해 습기를 완벽하게 빨아들이는 것. 잔디를 자주 깎고 누르는 건 기본이다. 마스터스 대회 기간에는 매일 그린을 여덟 번 깎고, 한 번 눌렀다고 한다. 속도도 이겨내기 힘든데 구겨놓기까지 했으니, 4~5퍼트는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당연한 일이다.퍼팅 라인은 기자가 직접 봤다. 뒤에서 지켜보던 월터가 앞으로 오더니 엄지를 치켜들었다. “존(기자의 미국 이름), 11야드야. 평소 치던 힘의 60%만 주면 돼.”

심호흡을 하고 스트로크. 아뿔싸. 핑 퍼터는 공보다 그린 바닥을 먼저 때렸다. 100돌이도 안 한다는 ‘퍼팅 뒤땅’. 하지만 공은 멈출 듯 말 듯 계속 굴렀고, 홀 앞 30㎝ 앞에 섰다. 동반자들은 박수 소리와 함께 “존, 골프 선수를 하다가 기자가 된 거냐”는 농도 쳤다.

1번홀 보기. 올해 2라운드 1번홀에서 보기를 친 우즈와 동타이자 같은 날 더블 보기를 적어낸 게리 우들랜드(2019년 US오픈 챔피언)를 뛰어넘은 성적표다.

‘텍사스 웨지’로 승부

1번홀 티샷을 칠 때의 ‘극한 긴장’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자 스윙이 살아났다. 2번홀(파5·515야드)의 첫 샷(드라이버)과 두 번째 샷(3번 우드) 모두 페어웨이에 떨어졌다. 세 번째 샷(7번 아이언)도 잘 맞았지만, 그린을 살짝 넘어갔다. 3년 전 ‘라이프 베스트 스코어’(81타)를 기록했을 때의 ‘손맛’을 느꼈다.

홀까지 남은 거리는 약 13야드. 월터에게 웨지를 청했지만, 돌아온 건 퍼터였다. “오거스타 그린 주변에선 함부로 웨지를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 아마추어 중에 제대로 컨트롤하는 사람을 거의 못 봤거든.”

그린 밖에서 퍼터로 공략하는 ‘텍사스 웨지’ 작전 명령이 떨어진 것. 이곳에서 12년 동안 캐디로 일한 월터의 경험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그린에서 칠 때보다 10%만 힘을 더 주면 돼.” 직전 홀에서 퍼팅 뒤땅을 경험한 기자는 월터가 얘기한 것보다 더 살살 쳤다. 그런데도 오르막 10m를 굴러 홀 2m 앞에서 딱 섰다. ‘파’였다.3번홀에서도 텍사스 웨지 작전으로 보기를 낚았다. 3번홀까지 2오버파. 우즈의 2라운드 1~3홀 스코어와 같다. 1번홀부터 ‘더블파’를 한 마틴 립튼 더선 기자, 3번홀까지 10타 정도 잃은 윌 그레이브스 AP통신 기자, 장타라며 거들먹거리다 트리플 보기를 연달아 적어낸 그렉 셰이머스 게티이미지 사진기자를 향해 ‘승자의 미소’를 날렸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3회)즐거운 지옥, ‘헬(Hell)렐루야’ 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