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다시 살고 사랑으로 완성되다, 엘가[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엘가의 '사랑의 인사'. /토론토심포니오케스트라 유튜브 채널

부드럽고 우아한 선율에 마음이 가득 차 오릅니다. 창밖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과도 어울리네요. 영국 출신의 음악가 에드워드 엘가(1857~1934)의 '사랑의 인사' 입니다. 정말 유명하고 익숙한 멜로디지만, 들을 때마다 설렙니다. 제목에 '사랑'이 들어가는 만큼,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작곡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엘가 스스로도 사랑이 충만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계급과 신분, 나이 차를 뛰어넘어 지고지순한 사랑을 했습니다. 그 마음이 흘러넘쳐 이 명곡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죠.

엘가는 '사랑의 인사' 뿐 아니라 '위풍당당 행진곡' 등으로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로도 꼽힙니다.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고, 사랑으로 완성된 엘가의 삶 속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에드워드 엘가
그는 악기상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2살에 혼자 '청년의 지휘봉'이란 곡을 만들 만큼 재능도 뛰어났죠.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음악 공부를 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결국 엘가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법학을 공부했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했죠.

하지만 음악에 대한 공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독학으로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작곡·지휘법도 익혔습니다.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홀로 꾸준히 음악을 익혔다니 대단한 열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엘가는 22세가 돼서야 음악가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교회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물려받았고, 한 병원의 부속 악단의 지휘자도 됐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다양한 곡을 만들었는데요. 하지만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고군분투 하다보니 이름을 알리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무명 생활이 길어 생활고도 겪었죠. 하지만 외롭고 힘겨웠던 그의 삶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 완전히 달라집니다. 29살에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온 여인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에게 반한 겁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뤄지기엔 정말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우선 캐롤라인은 부유한 귀족의 딸로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평민이고 음악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엘가와 큰 차이가 났죠. 캐롤라인의 부모님들은 두 사람 사이를 결사반대 했습니다. 캐롤라인이 9살이 더 많아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죠.

그러나 이미 서로에게 푹 빠진 두 사람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엘가가 30살이 되던 해 둘만의 약혼식을 가졌는데요. 이때 엘가가 캐롤라인에게 선물한 곡이 '사랑의 인사' 입니다. 자신을 만나 부모님과 사이가 멀어지고 앞으로 고생하게 될 것에 대한 미안함, 그럼에도 자신을 믿고 선택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함, 인생의 동반자를 만난 설렘과 환희, 영원한 사랑을 신께 맹세하는 진정성까지 모두 '사랑의 인사'에 녹여낸 거죠.

이 곡을 헌사 받은 캐롤라인은 큰 감동을 받았으며, ‘바람부는 새벽’이라는 자작시를 지어 화답했습니다.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노래와 시로 주고받다니 정말 낭만적입니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BBC 유튜브 채널

두 사람의 사랑은 결혼 이후에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캐롤라인은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엘가의 음악 활동을 적극 돕고 지지했습니다. 남편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음악을 잘 아는 동료로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죠. 아내의 응원과 도움으로 엘가는 생계를 위해 악기 교습을 하던 것도 중단하고 오직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이전에 비해 더욱 창작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거죠.

엘가가 곧장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결혼 후에도 한참 동안 힘겨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인내하며 버텼습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러 40대가 된 엘가에게 마침내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1899년 '수수께끼 변주곡'이 독일 스타 지휘자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되며 엘가는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제론티어스의 꿈'도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됐습니다. 두 곡 모두 큰 인기를 얻었고, 엘가는 영국 바로크 음악을 발전시킨 헨리 퍼셀 이후 200여년 만에 탄생한 '영국의 가장 훌륭한 음악가'라는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엘가는 44살에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음악 인생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 곡이 초연되자 관객들 모두가 기립 박수를 치고 함성을 쏟아냈습니다.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에드워드 7세 대관식을 앞두고는 이 곡에 가사를 붙여 '희망과 영광의 나라'로 재탄생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오늘날까지 영국인들에게 '제2의 국가'로 인식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계급과 신분상의 차이로 고난을 겪었던 두 사람에게 의미 있는 일도 생겼습니다. 1904년 엘가가 버킹엄 궁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거죠. 훗날엔 준남작 지위로 승격되기도 했습니다. 태생이 아닌 스스로의 실력으로 쟁취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바르샤바 필하모니 관현악단이 연주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필하모니아나도르바 유튜브 채널

이후 엘가는 오랫동안 음악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연 모든 창작 활동을 멈췄습니다. 이 또한 아내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1920년 엘가가 63살이 되던 해 아내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겁니다. 엘가는 자신의 영원한 뮤즈를 잃자 더 이상 음악을 할 의미도, 의지도 갖지 못했습니다. 아내에게 엘가가 모든 것이었듯, 엘가에게도 아내가 인생의 전부였단 사실이 감동적입니다. 매년 여름이 되면 런던에선 클래식 음악 축제 'BBC 프롬스'가 열립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마지막 곡으로는 늘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울려 퍼집니다. '희망과 영광의 나라'를 관객들이 떼창하는 진풍경도 펼쳐지죠. 위대한 사랑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나아가 한 국가와 세계 클래식사에 길이 남을 음악가를 탄생시켰다는 점이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와 그런 멋지고 의미 있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