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스텝 때문만은 아냐"…환율 급등 뒤엔 국민연금·서학개미 있다

연간 무역흑자 맞먹는 300억弗
국민연금, 해외주식·채권에 투자
환헤지 안 해 원화 약세 요인
사진=연합뉴스
원·달러 환율이 과거 ‘경제 위기’ 때나 볼 수 있었던 1240원 선에 육박하는 등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외환시장의 판이 바뀌었다’는 분석이 외환당국과 시장에서 나오고 있다. 최근 환율 급등은 표면적으론 빅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이상 인상)으로 대표되는 미국 중앙은행(Fed)의 긴축정책 때문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 서학개미 증가 등이 구조적으로 달러 강세(원·달러 환율 상승)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Fed의 긴축이 일단락되더라도 서울 외환시장에서 환율이 급락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환율 상승 배후엔 국민연금·서학개미

원·달러 환율 상승의 ‘배후’ 중 하나로 국민연금이 꼽힌다. 국민연금이 해외 주식·채권 투자를 늘리면서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매수 수요가 꾸준히 이어지고 이에 따라 환율 상승 압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2019년 수익률 증대를 위해 해외 투자를 늘리기로 한 이후 해마다 200억~300억달러 이상을 해외 주식·채권에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국의 지난해 무역수지 흑자 295억달러와 맞먹는 수준이다.외환시장 관계자는 “과거엔 무역수지 흑자로 서울 외환시장에 달러가 유입돼 환율이 하방 압력을 받았지만 지금은 국민연금의 해외 주식 투자가 이런 압력을 상쇄하고 있다”며 “국민연금은 해외 주식을 살 때 매수 타이밍이 오면 환율 수준과 무관하게 달러를 사들인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전체 투자액 중 해외 주식·채권 비중은 2017년 말 21.2%에서 지난해 말 33.8%로 늘었다. 상당 부분이 해외 투자인 대체투자(주식·채권 외 투자)까지 감안하면 해외 투자 비중은 40%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연금은 2024년까지 해외 투자 비중을 50%로 확대할 방침이다. 특히 초대형 달러 매수 주체로 떠오른 국민연금은 2018년 이후 해외 투자 때 환헤지를 하지 않고 있다.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두 현물 시장에서 사들이면서 원화 약세 요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서학개미’ 급증도 환율 상승을 뒷받침하는 요인이다. 이들의 해외 주식 투자 확대가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매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투자자의 해외 주식 순매수 금액은 219억달러에 달했다. 2년 전인 2019년(25억달러)과 비교하면 9배 가까이 많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중장기적으로 국민연금과 서학개미 등이 환율 상승에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의 ‘셀 코리아’도 영향


이에 반해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를 떠나는 추세다. 외국인 투자자는 지난해 국내 주식을 26조원(약 209억달러)어치가량 순매도했다. 외국인들은 올해도 매도 우위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의 긴축정책 등으로 차익 실현 욕구가 커진 것이다. 외국인들이 ‘셀 코리아’(한국 주식 매도)에 나서면 외환시장에선 그만큼 원화 매수 수요가 줄고, 달러 매수 수요가 증가한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 투자 확대가 환율 상승 압력을 키우는 측면도 있다. 국내 기업들은 최근 수년간 해외 기업을 직접 인수하거나 해외에 대규모 공장을 늘리는 추세다. 한국의 해외 직접투자 규모는 2017년 이전까지만 해도 연 300억~400억달러 수준이었지만 2018년부터는 500억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해엔 700억달러를 웃돈 것으로 추정된다.미국 등 각국 정부가 현지에 공장을 짓는 기업에 과감한 인센티브를 주는 데다 보호주의 강화로 국내 기업들의 해외 현지 생산시설 확보 필요성이 커졌다. 반면 국내 공장 신·증설은 높은 인건비와 제한된 시장 규모, 각종 규제, 강성 노동조합 등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도병욱/황정환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