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폼 나는 정책'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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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인플레 재앙 닥친 미국미국발(發) 통화긴축 파고가 심상치 않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더 강력한 긴축’ 예고에 전 세계 외환·증권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게 화근(禍根)이다. 미국의 지난달 물가상승률 8.5%는 1981년 이후 41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전 세계를 덮쳤던 2차 오일쇼크가 끝난 뒤 생각도 못했던 고공행진이다.
"최대한 돈 풀어 약자 돕겠다"
'당장의 박수'에 눈먼 지도자 업보
'병장 월급 200만원' 윤 당선인 공약
강행하기 전에 더 심사숙고해야
이학영 논설고문
다급해진 Fed가 내놓은 처방은 상식을 넘어선 ‘충격요법’이다. 현재 연 0.5%인 기준금리를 연내 2.5% 선까지 끌어올리는 초고속 인상을 예고했다. 한번에 0.25%포인트씩 올리던 기존 방식으로는 달성이 불가능하다. 단숨에 0.5%포인트 높이는 ‘빅 스텝’을 넘어 0.75%포인트를 한꺼번에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까지 거론하는 배경이다.가파른 금리인상은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에 엄청난 충격과 스트레스를 준다. 그걸 모를 리 없는 Fed는 “불가항력적인 외부 변수 돌출”을 구실로 삼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 장기화로 석유·가스·광물·농산물 등 자원 가격이 급등한 여파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미국 말고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과 영국이 7.5%와 7%씩 물가가 치솟은 것을 증거로 든다.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런 해명(아니, 변명)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는 국제 전문가가 많다. 미국과 유럽의 경제 환경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유로존 국가들은 치솟은 물가의 거의 4분의 3이 에너지와 식료품값 급등에 기인한 반면 미국은 그렇지 않아서다. 미국은 셰일가스 등 자체 에너지 조달 여건이 충분하고, 식료품의 물가 구성 비중도 유럽 국가에 비해 훨씬 낮다. 에너지·식품을 빼고 물가를 계산하면 유로존은 인플레이션율이 3%로 뚝 떨어지는 반면 미국은 6.5%나 된다. 한마디로 미국의 물가 급등은 중앙은행 탓이라는 지적이다(이코노미스트 4월 23일자, “Fed는 왜 역사적인 실수를 저질렀나”).
미국이 코로나 쇼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이 풀어버린 돈이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는 경고가 나온 지 오래인데도 최근까지 무대응으로 일관한 게 대표적 실책으로 꼽힌다. 선제적 인플레 예방을 위해 금리를 올리는 ‘인기 없는 조치’를 외면한 결과다.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이 중앙은행을 정치에 오염시킨 것을 더 큰 원인으로 지목하는 사람이 많다. Fed의 사명을 ‘물가 안정을 통한 통화가치 유지’를 넘어 일자리 확대, 심지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 유도 등 정치·사회 영역으로 넓히며 ‘폼’을 내느라 본연의 임무에 소홀했다는 지적이다.미국인들에게 ‘인플레 날벼락’을 안긴 또 다른 주범으로 조 바이든 대통령이 꼽힌다.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작년 1월 취임한 그는 “빈부격차 해소와 경제 활력 주입에 필요하다”며 임기 초부터 막대한 재정을 살포했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정부 때 이미 코로나 구제 예산이 몇 차례나 풀렸는데도 1조9000억달러(약 2400조원)의 경기부양자금 추가 집행을 밀어붙였다. 돈을 줄 곳을 찾다 못해 자발적 실업자들에게 최저임금보다 더 많은 실업급여를 주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일하지 않고 놀아야 더 많은 돈이 들어오게 만든 결과는 뻔했다. 미국 기업들은 평균 급여를 1년 새 6%나 올리고도 일손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 그 여파는 풀린 돈으로 인해 시장 수요는 넘쳐나는데 기업 활동을 통한 공급이 달리는 것으로 직결됐고, 물가 급등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오로지 조 바이든의 인플레이션이다”(월스트리트저널 3월 11일자 사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바이든과 파월이 찬 ‘똥볼’은 모든 국정 책임자들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교본이다. 곧 출범할 대한민국의 윤석열 정부가 특히 살피고 새길 것을 권한다. 국가 재정건전성에 빨간불이 켜진 터에 물가 쇼크까지 겹쳐 있는데도 “공약을 이행하겠다”며 병장 월급 200만원 지급 등 연간 최대 17조원이 들어가는 현금 살포 사업을 국정과제로 강행할 것이라는 소식이 불길하다. ‘폼 나 보이는’ 정책으로 받는 ‘값싼 박수’가 나라 앞날에 두고두고 큰 골칫덩이, 화근이 되는 게 아닌지 겸손하고 성실한 성찰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