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점 모은 '큰손 컬렉터'…"수집은 예술에 생명 불어넣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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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 개인 소장품 전시회 개최그림을 산다는 건 누군가의 인생을 사는 것과 같다. 혼을 담아 작품을 만드는 게 작가의 일이라면, 그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수집가의 몫이다.
서울미술관 10주년 기념전
40년전 본 '황소 복제품'에 반해
본격적으로 미술품 수집가 길로
다들 "미쳤다" 말린 서울미술관
10년간 107만명 다녀간 명소 돼
김환기 '아침의 메아리' 최초 공개
배우 최불암 씨가 내레이션 맡아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65)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지난 40년간 한국 근현대 회화 500여 점을 쓸어담은 ‘큰손’ 컬렉터다. 그런 그가 평생 동안 모은 소장품 가운데 ‘알짜’만 추려내 전시회를 열었다. 자신이 10년 전 설립한 서울 부암동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다. 이 미술관은 안 회장의 소장품으로 지난 13일부터 개관 10주년 기념전 ‘두려움일까 사랑일까’를 열고 있다. 이중섭, 정상화, 박서보, 박수근, 김환기, 서세옥, 이응노, 유영국 등 한국 근현대 미술을 이끌어온 화가 31명의 대표작 140점을 들여놨다.
안 회장은 “1983년 우연한 계기로 그림에 빠져들어 고통스럽고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며 “수집한 500여 개 작품마다 나름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림과의 인연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제약회사 영업사원 시절, 비를 피하려고 들어간 인사동 액자집에서 이중섭의 ‘황소’ 복제품을 본 게 미술품 수집의 계기였다. 7000원을 주고 산 복제품에 매료된 그는 인사동을 찾아 진품 가격을 물었다. 기와집 한 채 값은 줘야 한다는 말에 ‘언젠가 꼭 사리라’ 마음먹었다.그렇게 안 회장은 이중섭에 빠져들었다. 첫 수집 작품도 이중섭(‘은박지 그림’)이었다. 황소를 다시 만난 건 2010년. 하지만 가격이 너무 높다 보니 선뜻 주머니를 열 수 없었다. 안 회장은 황소 주인에게 “딱 하루만 빌려달라. 집에 걸어놓고 바라보면 답이 나올 것 같다”고 부탁했다. 안 회장은 황소를 손에 넣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감정가 17억6000만원)에 현금 18억원을 얹어줘야 했다.
안 회장의 본업은 의약품 유통업이다. 제약회사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6개 계열사를 둔 의약품 도매기업 유니온약품을 일궈냈다.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은 그림을 사모으고, 미술관을 짓는 데 쓰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그림을 투자 수단으로 얘기했지만, 그는 그너머를 봤다. “2년 내 망할 것”이란 주변 걱정에도 불구하고 서울미술관 건립을 밀어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미술관 운영은 두려움의 대상이자 사랑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지난 10년간 서울미술관에는 107만 명이 다녀갔다. 세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기획전시를 통해 젊은 작가들의 등용문이자 명작의 갤러리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 회장은 “돈 많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는 미술관은 싫었다”며 “젊은이들이 그림을 직접 보고 공감하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40년차 컬렉터인 만큼 얘기거리도 많다. 그는 국내 최초로 동판화 작업을 한 김상유 작가(1926~2002)의 유화 작품 80%를 서울미술관이 갖게 된 스토리를 들려줬다.
“2002년 김 작가가 전시회를 열었을 때 화랑에 있던 작품을 모조리 샀습니다. 우선 명상의 세계를 순수하게 그려낸 게 마음에 쏙 들었어요. 김 선생 작품은 여러 개를 모아놓고 봐야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기도 해서…. ”
이번 전시에는 소장품 중 최초로 공개하는 작품도 많다. 김환기의 ‘아침의 메아리’(1965), 도상봉의 ‘국화’(1973), 한묵의 ‘푸른 나선’(1975), 황영성의 ‘소의 침묵’(1985), 정상화의 ‘무제 12-3-5’(2012) 등이다. 김환기 화백의 점화 연작 중 최고로 꼽히는 ‘십만 개의 점’(1973)은 단독 공간에 설치됐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를 배우 최불암이 내레이션해 집중도를 높였다.모든 전시 작품에는 작가, 작품 설명과 함께 ‘수집가의 문장’이 쓰여 있다. 안 회장의 작품 수집 배경과 감상이 적힌 글이다. 40년간 미술품 수집을 하며 세운 원칙도 있다. ‘작가 개인과의 거래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집가가 장사꾼처럼 보이면 작가는 다음 작품을 할 때 자신의 예술성을 표현하기 어려워집니다. 당장 싸게 사기 위해 미술 시장의 불투명성을 부추기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는 미술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작품을 보는 눈을 어떻게 갖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만으론 가질 수 없어요.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부을 때 비로소 보입니다. 하루 만에 그린 작품은 3~4년을 걸어놔도 안 팔려요. 하지만 3~4년 공을 들인 그림은 전시한 지 하루도 안 돼 팔리죠. 명작을 보는 눈은 우리 모두의 안에 이미 있습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