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죽거나 망해야만 벗어날 수 있는 '동일인 족쇄'

공정거래위원회가 그제 ‘2022년 공시대상기업집단’ 76곳과 동일인(총수)을 지정해 발표했다. 두나무·크래프톤·보성·KG·일진·OK금융·신영·농심 등 8곳이 자산 5조원을 넘겨 새로 공시대상기업집단이 됐다. 넥슨 총수에는 고(故) 김정주 창업자의 배우자인 유정현 NXC 감사가 지정됐다.

치열한 경쟁과 숱한 난관을 뚫고 ‘정부 공식 인증’ 대기업 반열에 오른 기업과 오너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대기업이 된 순간부터 없던 규제가 수십 개씩 쏟아지는 현실을 생각하면 결코 축복받을 일이 아니라는 게 안타깝다.대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총수가 되면 국내외 계열사 공시 및 자료 제출 의무가 생기고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받는다. 얼굴도 모르는 먼 친인척(6촌 이내 혈족·4촌 이내 인척)의 사업 현황과 보유 지분까지 조사해 신고해야 한다. 갑자기 동일인이 된 유정현 감사 같은 사람은 무척 황당해할 게 분명하다. 5년 전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회사를 ‘총수 없는 대기업’으로 분류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런 규제가 부담스러워서였다. 남다른 창의력과 추진력을 앞세워 벤처기업을 거대 기업으로 키워낸 그가 온갖 규제 속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앉고 싶었겠는가. 동일인에 대한 그물망 규제는 총수들로 하여금 국내 사업을 키울 의지를 꺾는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투자나 출자 결정을 할 때 불편함을 느끼는 기업인들의 체감도는 일반인의 상상을 넘어선다.

대기업집단과 총수 지정제가 생긴 1980년대엔 일부 재벌 기업의 국내 시장 독점이 가능했지만, 지난해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의 해외 법인 매출 비중이 50%를 넘어설 정도로 글로벌화가 진전됐다. 주요 대기업의 외국인 지분이 적지 않고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의결권 제한, 다중대표소송 등 대주주 견제 장치도 촘촘해졌다. 오너가 사망하거나 기업이 망해야 총수 및 대기업집단 규제의 족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누가 대기업을 꿈꾸며 창업에 나서겠나.